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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형의 고독력] #6 인간의 본성, 배회 심리

단절의 시대, 연결을 묻다.

by 이시형박사

이 칼럼 시리즈는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가 자신의 유년 시절과 가족사를 바탕으로, 현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고독, 외로움, 관계의 단절, 독립의 역설을 성찰합니다. 과거의 체험을 통해 오늘의 문제를 되돌아보고, 진정한 연결과 연대의 의미를 모색하며 고독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치매를 참 두려워한다. 실제로 나이가 팔순, 구순이 넘어가면 치매나 암에 대한 걱정이 누구에게나 따라붙는다. 나와 친한 노인정신의학 전문가 일본의 와다 히데키 교수는 자기가 근무한 노인병원에서 팔순 노인들을 부검한 결과, 대부분 치매나 암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본인은 모르고 세상을 떠났으니, 오히려 행복한 죽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70대 후반이 되면 건강검진을 매번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차피 암이나 치매는 만성병으로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에 알면 기분만 찜찜할 뿐, 치료가 잘 되는 것도 아니니 모르고 지내는 게 오히려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치매 환자를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배회’ 때문이다. 어느 날 홀연히 집을 나가 소식도 없이 며칠씩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온 가족이 나서 온 동네를 헤매도 흔적이 없고, 며칠 후에야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곤 한다. 보호자 입장에서는 정말 놀라고 황당한 일이다. 어떤 요양원에서는 배회를 막기 위해 환자를 침대에 묶어놓기도 한다. 오죽하면 그렇게까지 하겠는가. 보호자도, 요양원도, 이 배회 문제는 정말 애를 먹인다.


요즘은 배회하는 환자에게 추적 장치를 달아주거나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두는 등, 경찰이나 사회복지기관이 쉽게 연락할 수 있도록 해놓아 이런 문제가 많이 줄었다. 그래도 여전히 배회는 보호자들에게 큰 걱정거리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에게는 어디론가 움직이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학자들은 인간을 ‘호모 모벤스(Homo movens)’라 부른다. 가정집이나 좁은 아파트에만 있으면 답답한 것은 당연하다. 병원도 마찬가지, 공간이 너무 제한되면 답답함이 극에 달한다. 인간도 동물처럼 억지로 묶어두면 반항하고 뛰쳐나가려 하는 본성이 있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움직임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은 ‘움직이는 물체’라고 말한다.


목장에서 가축을 풀어놓고 방목하면 주인을 따라오지만, 가둬놓으면 울 밖으로 나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인간에게도 방랑본능, 이동욕구가 있다. ‘떠돌이’로 살아가는 집시들이 떠오른다. 일정한 장소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떠돌아다니는 삶,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사람을 억지로 가둬두면 당연히 반항하게 된다. 배회하는 치매 환자도 어쩌면 인간의 이런 본성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근무한 미국 정신 병원에서 서커스단을 본 적이 있다. 화려한 무대에서 줄넘기 묘기를 부리던 한 여인이 다음 날 점심시간, 화장을 지운 얼굴로 트럭 옆에 앉아 지도를 펴놓고 있었다. 다음 공연 장소를 찾고 있는 모양이다. 어제의 화려한 무대가 끝나자, 다시 떠나야 하는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고독함이 느껴졌다. 물론 내 감상일 수도 있지만, 그 뒷모습이 오래도록 외로운 그림자와 함께 마음에 남았다.


요즘은 치매 환자들을 위해 ‘농원 병원’이라는 제도를 운영하는 나라도 있다. 덴마크와 네덜란드처럼, 아침에 보호자가 큰 농장에 환자를 맡기고 저녁에 데려가는 방식이다. 환자들이 조금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나도 이런 방식이 참 좋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마을 사람들끼리.


정신과 병동도 마찬가지. 예전에는 폐쇄 병동이 많았지만, 요즘은 개방 병동이 늘어나는 추세다. 환자를 가두면 오히려 증상이 악화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동물에게도 고독감이 있느냐는 질문에 학자들은 대부분 ‘있다’고 답한다. 아프리카 초원의 얼룩말, 들소, 영양처럼 무리를 이루어 살아야 생존이 가능한 동물들은 무리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포식자의 표적이 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본능적으로 무리와 함께하려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갇혀 있는 것을 싫어하는 본능이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방황하는 존재다. 무리 속에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혼자이고 싶어 한다. 이중적이다. 나는 대학 시절, 결혼식 사회를 보곤 했는데, 마이크를 잡고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로 시작하는 김삿갓 시인의 노래를 불렀다. 당시 그 노래가 얼마나 유행했는지, “오늘 이 노래 부르면 벌금을 내야겠다”라고 농담해 웃음을 자아내던 기억이 난다.


김삿갓은 벼슬도 마다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보다는 떠돌며 졸부들을 풍자하고 웃고 떠나버리는 모습으로 우리 민족의 정서를 울렸다. 그 모습이 방랑하는 인간의 본성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 ‘인간의 본성, 배회 심리’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그 노래가 문득 떠올랐다. 인간은 누구나 방황한다.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무리 속에서 있으면서도 혼자이고 싶어 하는, 참 묘한 존재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한 단면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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