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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형의 고독력] #7.여생이 아닌, 남은 삶의 가치

단절의 시대, 연결을 묻다.

by 이시형박사

이 칼럼 시리즈는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가 자신의 유년 시절과 가족사를 바탕으로, 현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고독, 외로움, 관계의 단절, 독립의 역설을 성찰합니다. 과거의 체험을 통해 오늘의 문제를 되돌아보고, 진정한 연결과 연대의 의미를 모색하며 고독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와 질문을 던집니다.





‘여생(餘生)’. 남은 생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남은 인생이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여생’이라고 하면 마치 덤으로 살아가는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 인생의 남은 시간을 누가 계산할 수 있을까. 하느님도 잘 모르실 것이다. 70세 이후의 삶은 분명 고독과 대면하며 살아가야 하는 시기임에 틀림없다. 참으로 중요한 시기다. 요즘 의학계에서는 ‘인생 리쥬비니에이션(rejuvenation)’, 즉 인생을 다시 재생시키는 운동이 한창이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젊게 다시 살아가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앞으로의 삶이 얼마나 더 젊게,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이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시기에 우리가 반드시 직면하게 될 문제가 있다는 사실, 바로 ‘고독’이다. 나이가 들수록 부고 소식이 많아지고, 친구도 하나둘 떠난다. 세상이 낯설어지기도 한다. 요즘 나는 시간이 좀 생겨서 TV를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가수가 노래 한 곡을 부르고 박수를 받고, 또 한 곡을 부르고 하는 게 보통이었는데, 요즘은 경연을 한다. 얼마 전에는 꽤 실력 있는 가수가 타향살이를 부르는 모습을 봤다. 그 노래가 내 가슴을 울렸다. 그 가수는 1등을 못 하다가, 그날 그 노래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1등을 차지했다. 요즘은 젊은 여성 청중이 많은데, 그들에게도 고향이라는 정서가 있구나 싶었다. 우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오랜만에 노래다운 노래를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BTS처럼 세계인의 마음을 울리는 노래도 좋지만, 나는 따라 부를 수가 없다. 요즘 노래는 너무 빨라서 숨이 차서 못 부르겠다. 그래서인지, 다 함께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없다는 사실이 조금은 슬프게 느껴졌다. 같은 노래를 함께 부르고, 같은 감정을 함께 나누던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오빠 생각’이라는 노래가 있다. 어른도 아이도 다 같이 부르던 노래였다. 유학 시절 소녀 합창단이 와서 ‘오빠 생각’을 부를 때, 마지막 가사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가랑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를 듣고 눈물 흘리지 않은 유학생이 없었다. 지금도 그 노래만 떠올리면 목이 메인다.


같이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공감이고, 정서이고, 함께 울고 웃는 동질감이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의 노래는 어쩐지 낯설게만 느껴진다. 세대가 다르다는 이질감이랄까. 그래서 나는 ‘여생’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다. 남은 인생을 그저 덤으로, 더불어 흘려보내듯이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피할 수 없는 것은, 죽음이다. 언뜻 보면 죽음은 끝처럼 보이지만, 그 언저리를 지켜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 나이 든 사람들의 숙명이다. 그 시간을 충실히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언젠가는 고독의 날들이 찾아온다. 그리고 혼자 살다가 혼자 죽는 날이 온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감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깊은 정서를 안겨주는지 젊은 날엔 미쳐 몰랐다. 해가 지고 나면, 내일 새벽 다시 희망의 태양이 떠오른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태양신에게 젊은이의 심장을 바쳤다. 내일의 희망찬 태양을 위해서다. 그 젊은 용사를 ‘세크리피시오(sacraficio)’, 즉 희생이라 불렀다. 얼마나 끔찍한 풍습인가. 그러나 그만큼 새로운 태양을 기다리던 그들의 절실함이 느껴진다.


우리도 마찬가지. 하루가 저물면, 다시 희망의 아침이 찾아오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나는 요즘 ‘미래학당’ 강의를 즐겨 듣는다. 젊은 학자들의 소크라테스 인문학 강의를 들으면,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지식과 지혜가 다시 깨어나는 느낌이 든다. 그런 시간을 만들 무료함이나 권태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늙음을 재촉하는 길밖에 없다. 요즘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컬처센터 프로그램을 잘 만들어두어, 돈 들이지 않고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사람에게는 삶이 주는 무한한 보물이 있다. 아무리 힘들고 바쁜 삶이라도, 그 안에는 즐거움과 보람이 숨어 있다. 그것들을 꺼내어 읽고, 누군가와 나누고, 그렇게 삶의 행복을 배워야 한다. 삶이 이렇게 행복한데도,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매일의 일상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사후 세계가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른다. 믿지도, 안 믿지도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음이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라는 사실이다.

늙음과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나 그것을 준비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삶의 소중함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순간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깨닫게 된다. 나는 75세 되던 해에 운전을 그만두었다. 약간 어지럽고 방향 감각이 예전 같지 않아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포기한 것이다. 운전면허증을 반납할 때, 삶의 반을 포기한 듯한 허전함이 들었다. 지금도 운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결단했다. 운전면허증은 따는 것보다 포기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그 선택을 통해서라도 내 남은 시간을 조금 더 충실히 살기 위한 준비를 했다고 믿는다. 삶은 여생이 아니다. 그저 주어진 덤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삶을 새롭게 가꾸고 채우는 기회다. 그 시간을 소중히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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