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시대, 연결을 묻다.
이 칼럼 시리즈는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가 자신의 유년 시절과 가족사를 바탕으로, 현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고독, 외로움, 관계의 단절, 독립의 역설을 성찰합니다. 과거의 체험을 통해 오늘의 문제를 되돌아보고, 진정한 연결과 연대의 의미를 모색하며 고독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와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가 1970년대 초반이었다. 그때 나는 미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상한 환자를 만나고 깜짝 놀랐다. 바로 화병 환자였다. 그때는 ‘화병’이라는 진단명조차 없었고, 미국에서도 그런 환자는 본 적이 없었다.
당시 한국에서 화병을 앓는 사람들은 대부분 며느리들이었다. 시어머니의 구박을 이기지 못해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이 가슴앓이를 하며 지냈다. 참 끔찍한 현실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젊은 후배들의 보고를 보니, 요즘은 오히려 시어머니 쪽이 며느리 눈치 보느라 화병에 걸리는 경우가 더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로서도 참 놀라운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노인들의 강력 범죄가 급증했다는 점이다. 지난 5년간 전체 강력 범죄는 오히려 줄었는데, 노인 범죄만은 계속 늘었다는 경찰 보고에 나도 깜짝 놀랐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바로 화병이었다. 노인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고독하다. 심리적인 상실감과 사회에 대한 분노, 원한이 쌓이다 보면 그것이 통제되지 못하고 폭발하는 것이다. 그 분노는 때로는 자살로 이어지기도 하고, 이웃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끔찍한 범죄로 번지기도 한다.
노인이 되면 대부분 은퇴 후 인간관계가 단절된다. 가족들도 멀리 살거나 끈끈했던 가족 공동체는 예전 같지 않다. 사회적 역할도 줄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지면서 대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소외감이 더해진다. 그런 심리적 고독이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폭발로 이어진다.
최근 경찰 통계에서도, 자살뿐 아니라 분노가 폭발하는 노인 범죄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고령이 되면 신체적으로도 도움을 받아야 하고, 몸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 답답함과 분노가 쌓이기 마련이다. 정신적으로도 사회적 소외와 역할 상실이 겹치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국과 일본에도 고독 문제를 담당하는 정부 부서가 생겼다. 얼마 전에는 서울시에도 고독 정책관이 생겼다고 하니, 고독 문제에 정부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우리 국민의 21%가 ‘나는 고독하다’라고 응답했다는 통계도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현역 시절 ‘은둔형 외톨이’를 국내 학회에 처음 보고했었다. 당시에는 주로 젊은이들 문제였다.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해 외출도 거의 하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아이들이었다. 친구도 없고, 겨우 편의점이나 연극, 영화 정도만 혼자 나가서 보고 오는 수준이었다. 가족과 대화조차 단절된 모습에 나 역시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요즘은 이 문제가 노인 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이제 80세, 90세, 100세 시대를 살고 있다. 신체적 건강도 중요하지만 정신적 건강은 더 중요하다.
나는 요즘 ‘품격 있는 노년’, ‘존경받는 노년’, ‘행복한 노년’을 늘 생각한다. 루스벨트 대통령 부인이 말했듯이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 작품이다.” 이 말이 내 뇌리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려면 품위 있게 늙어야 한다.
우리는 고독한 노인의 폭발로 인해 자살이나 범죄가 늘어나는 사회가 아니라, 품격 있고 행복한 노년을 지켜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아름다운 노년을 예술 작품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루스벨트 대통령 부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