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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형의 고독력] #9 고독의 두 얼굴

단절의 시대, 연결을 묻다.

by 이시형박사

이 칼럼 시리즈는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가 자신의 유년 시절과 가족사를 바탕으로, 현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고독, 외로움, 관계의 단절, 독립의 역설을 성찰합니다. 과거의 체험을 통해 오늘의 문제를 되돌아보고, 진정한 연결과 연대의 의미를 모색하며 고독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와 질문을 던집니다.




병리적 고독(loneliness)과 건설적 고독(solitude)은 정신의학에서는 전혀 다르게 다룬다. 병리적 고독은 사회적 고립에서 비롯된 병적 상태이다.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한 건강 위협이 되는 심리적 질환이다. 고혈압, 면역력 저하, 불안, 우울, 치매 위험, 조기 사망률 증가 등과 연관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특히 만성적 외로움은 흡연이나 비만보다 건강에 더 해롭다는 보고도 있다. 이처럼 병리적 고독은 적극적인 예방과 치료가 필요한 상태이다.


반면 건설적 고독은 스스로 선택한 시간이며, 때로는 가장 창조적이고 회복적인 공간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고독은 자발성과 목적성이 있는 상태다. 자신을 재정비하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이 고독 속에서는 감정을 조절하고 정서를 안정시키며, 자기 인식과 창의성을 높일 수 있다. 단 15분간의 고독만으로도 불안을 줄이고 마음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는 매우 인상적이다. 이때 건설적 고독은 병리적 고독을 극복해낸 심리적 승화의 결과이다.


병리적 고독은 주변에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서적 연결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겉보기에는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속감이 결여되어 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인지 기능에 오류가 생기고, 정서 장애로 이어지며, 고립감은 점점 더 깊어진다. 특히 고령층에서 이와 같은 외로움이 만연해 있으며, 이는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동시에 해치는 심각한 사회 문제다.


이에 반해 건설적 고독은 목적이 있고 긍정적인 고립이다. 혼자 있지만 공동체와의 연결망은 유지된다. 이처럼 두 가지 고독은 다음 측면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첫째, 병리적 고독은 원하지 않은 고립이며 건설적 고독은 의도적으로 선택한 고립이다. 둘째, 병리적 고독은 정서적 고통을 수반하지만 건설적 고독은 내면을 단련시키고 삶을 정리하는 시간이 된다. 병리적 고독은 우리를 병들게 하지만, 건설적 고독은 오히려 내면의 힘을 길러준다.


최근 연구는 병리적 고독이 노년층만의 문제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특히 젊은 층의 절반 이상이 외로움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세대에 따라 고독을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젊은이는 고독을 회피하려 하고, 중장년층은 고독 속에서 오히려 자신을 재정비하려는 경향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고독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라 삶을 다시 정비할 수 있는 선택적 시간으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병리적 고독을 어떻게 건설적 고독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첫째, 재해석이 필요하다. 고립된 시간을 단순히 허무하게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휴식과 자기 돌봄, 삶의 계획을 위한 시간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둘째, 정서적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독서, 명상, 글쓰기, 산책과 같은 활동은 건설적 고독의 시간으로 바꿔주는 좋은 도구가 된다. 셋째, 최소한의 사회적 연결은 유지되어야 한다. 아무리 혼자 있어도 ‘누군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믿음만 있다면, 외로움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현대인은 너무 많은 시간을 병리적 고독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자기 의지로 선택한 건설적 고독은 창의력과 정서 안정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고독은 병이지만, 약이 될 수 있다. 하루 중 짧은 시간이라도 스스로 고독을 선택하고 그 시간을 잘 누릴 줄 아는 사람은, 고독에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러한 심리적 전환 과정을 ‘승화’라고 부른다. 고독의 고통이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되는 상태다. 우리는 병리적 고독을 건설적 고독으로 바꾸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고립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심리적 면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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