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겨울 추위가 며칠 째 계속되면서 불타 올랐던 일에 대한 의지가 눈 속에 파묻혔다. 갑작스레 내리는 퍼슬퍼슬한 눈 사이를 헤치고 집을 향했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 생각보다 빠르게 집에 도착했던 터라 아내가 아직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문을 여는 순간 집안을 감싸고 있던 새콤 매콤한 냄새가 코를 통해 목구멍을 넘어 위장으로 직행했다. 어쩌면 뇌로 직행한 냄새가 위장을 마구 움직여줬을지도 모른다. 배가 고팠다.
빠른 저녁 준비를 위해 아내를 괴롭히지 않고, TV 앞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때마침 "집밥 백 선생"이 방송 중이었다. 오늘의 주제는 김밥. '김밥이라..., 김밥에도 노하우가 있나? 널찍한 김 한 장에 식초로 감칠맛을 낸 조미 밥 그리고 취향에 맞춘 다양한 재료들을 가지런히 뉘어 돌돌 말아주면 그것이 김밥이 아닌가?' 나에게 김밥이란 그런 음식이었다. 화장실 갈 생각조차 머릿속에 들어차지 않게 바쁜 날 후배 손에 이천 원을 쥐어주며 "나 김밥 한 줄만 사다 줄래?" 라며 심부름 아닌 심부름을 시켜 모니터 앞에서 맛도 모르고 삼키듯 먹는 음식 그뿐이었다.
그런 김밥을 백 선생은 중차대한 노하우를 전수하듯 진한 눈썹 사이 내천자를 그리며 자못 심각한 태도로 네 명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듣고 있는 제자들 역시 진중하게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삼인성호(三人成虎)였던가? 사람이 세명 모이면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더니 나도 모르게 어느새 백 선생의 제자들 사이에 자리 잡고 그의 말을 꼼꼼히 듣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은 내가 눈을 헤치고 나와 집에 일찍 도착해 아내의 저녁 준비를 방해하지 않고, TV 앞에 앉아 생긴 일이다.
먼저 김밥말이에 김을 올려두고 밑간 한 밥(이 밑간이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다. 식초가 아닌 소금과 참기름으로 하는 것이 포인트라 한다.)을 야구공만 한 크기로 집어 들어 김의 2/3 지점까지만 넓게 펴준다. 그리고 속 재료의 가짓수에 따라 밥의 범위를 조금씩 변화를 줘 김의 양끝이 딱 맞물리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였던 것이다.
식초로 만든 조미 밥이 아닌 소금과 참기름으로 밑간을 한 밥. 그리고 2/3 지점까지 펴 발라주는 것. 머릿속에 이 두 가지를 똑똑히 기억하기 위해 곱씹어 삼켜 넘기는 중 우리 집 저녁밥이 완성됐다. 이내 백 선생의 제자에서 온전한 나로 다시 돌아오게 됐다.
하지만 밥을 먹는 내내 김밥에 대해 심오하게 그리고 심각하게 다양한 방면으로 고민하게 됐다. 싸고 쉬운 음식이라 여겼던 김밥이다. 유년 시절 소풍이나 외부 행사가 있는 날에 어김없이 새벽 눈 뜬 어머니가 싸주신 김밥 도시락, 야간 트레킹 길에 아내가 싼 예쁜 김밥 도시락, 그리고 회사 컴퓨터 앞에 앉아 씹어 삼켰던 맛 모를 김밥 등등. 내 손에 쉽게 들어와 쉽게 입으로 알알이 들어갔던 김밥이다. 내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과정을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오늘 백 선생 덕분에 어떤 상황에서든 김밥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 같다. 그리고 그 김밥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으로 하나하나 맛을 음미하며 즐기는 음식으로 여길 것이다. 김밥은 과학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