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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May 23. 2022

이미 맛본 편의를 버린다는 것

 

처음으로 카페용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마셨을 때의 짜릿함을 잊지 못한다. 작은 종이컵에 담긴 자판기 믹스커피가 아닌, 플라스틱 뚜껑에 홀더까지 제대로 갖춰진 일회용 컵에 담긴 쓰디쓴 아메리카노는 또 하나의 현대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놀라운 아이디어였고 탁월한 브랜딩이었다. 가벼워 보이는 일상의 루틴 안에서 프리미엄을 창조해낸 것이라고 여겼다. 커피를 들고 다니며 마시는 게 가능하다는 걸 왜 이전에는 몰랐을까. 없을 땐 모르고 지냈지만 한 번 맛을 보면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건 커피나 스마트폰이나 매한가지다.


일회용 컵은 정말 대단한 발명품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엔 특정 글로벌 브랜드의 전유물이었던 그것이 점차 온 동네를 카페로 물들이며 진화해나가기 시작했다. 컬러와 그래픽으로 디자인을 뽐내는 도구가 되었고 컵을 두 개 겹치거나 다회용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크고 긴 사이즈로 온갖 아이디어를 뽐내는 장이 되었다. 누가누가 더 그럴싸한 갖고 싶은 일회용 컵을 만드나 내기하듯 현란한 외모 경쟁이 오갔지만 승자는 없었다. 쓰임을 다하면 길거리 어딘가에 처절하게 버려진 채로 기약도 없이 사라지지 못하는 신세가 되는 건 1등도 예외가 없었다. 오히려 많이 사랑받을수록 더 많이 버려졌으니, 하루살이보다 더 짧은 일회용 컵의 운명은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이 그럴싸하고 편리한 습관은 한 번 맛보면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다. 아침에 집에서 가볍게 나가 커피 한 잔을 사들고 회사, 학교, 약속 장소 등으로 향하는 그 달콤함은 그 어떤 시럽보다 당도가 높다. 일회용 컵이 사라지는 건 모두에게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불편함을 선사한다. 매장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설거지라는 귀찮고 무거운 일과가 추가되고 그만큼 시간 대비 더 팔 수 있는 커피잔의 수는 줄어든다. 포장은 고급스러우나 현실은 박리다매인 콘텐츠의 매력이 사라지는 것이다.  


카페 손님에게는 곳곳의 상황에서 더 다양한 불편함이 스며든다. 매장 안에서 음료를 마시다가 가지고 나갈 수 없고, 텀블러를 들고 다닐 경우 무거운 짐과 설거지는 내 몫이 된다. 외출할 때도 잊지 말고 챙겨야 하는 물건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니 정신도 귀찮아진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 여러 명이 한꺼번에 주문해 마시던 커피 문화도 사라진다. 커피를 쏘고 싶어도 쏠 수 없고 그렇다고 한 명이 일일이 개인컵을 수거해 담아오기도 불편해진다. 편의로 누리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일회용 컵이 사라질 경우 생기는 편의라고는 고작 개인컵으로 받는 몇 백원의 할인 혜택과 미세 플라스틱을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건강함뿐이다. 거리에 아무렇게나 쌓인 쓰레기를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도 있긴 하지만 크게 와닿는 건 아니다. 하루에도 일회용 컵을 몇 개씩 쓰며 누리는 편의와 맞바꿀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건 없다. 세탁기에 건조기까지 쓰며 살다가 냇가에서 빨래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식기세척기가 다 해주는 걸 마다하고 설거지옥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진짜 좋은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눈앞에 편의는 차마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이젠 너무도 당연해서 유혹으로도 느끼지 않는다는 게 맹점이지만.


그런데 우리는 잘 살고 있나. 풍요롭나. 기계와 쓰레기가 주는 풍요 말고 내적으로 풍요로운가 묻고 싶다. 모든 걸 다 떠먹여주는 편의의 세상은 왜 우리를 한 걸음 한 걸음 더 암울해지게 만들고 있는 걸까. 시간을 쪼개어 쉼 없이 달리는데 왜 모든 것은 더 더럽고 위험하고 불확실해지기만 하는 걸까. 불공정해지는 걸까. 불평등해지는 걸까. 혐오스러워지는 걸까.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모든 걸 마음대로 다 할 수는 없는 거야."


내가 요즘 아이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아직 세상 경험이 적은 아기는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 왜 위험한지, 물건을 던지는 것과 친구를 때리는 게 왜 나쁜 건지, 왜 시간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왜 안 되는 것이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여기에 덧붙여 말한다.


"네가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고 다른 친구를 아프게 하지 않고 약속을 잘 지키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아이는 되묻는다.


"엄마 이거 해도 돼요?"


이건 아이를 억압하는 게 아니다. 아이는 엄마의 결정을 믿고 책임 안에서 보호받고 있는 시기이기에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그럼 난 일관된 기준 안에서 해도 되는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해 준다.


한정된 환경 안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아이는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몰라도 되는 건 아니다. 어렴풋하게 인지하더라도 지금부터 배워야 한다. 아마도 나는 이 말을 앞으로도 백번 아니 천 번쯤은 더 하게 되겠지. 아이가 뜻을 이해하고 지킬 수 있게 되는 나이가 될 때까지.


책임지지 않는 행동을 누리는 건 자유라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빼앗은 풍요는 정당하지 못하고 '라이프스타일'이나 '문화'라는 이름으로 치장할 수 없다. 나의 편의와 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해 의미를 꾸미는 일은 결국 다시 내게 돌아와 나를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


 글을 쓰게   다가올 6 1일부터 시행 예정이었던 일회용  보증제가 소상공인들의 반발을 이유로 무산되고 12월로 미뤄졌기 때문이다. 카페를 운영하는 친구의 불만 섞인 토로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12 만에 부활하는  제도가 이렇게 쉽게 '유예'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게   몰랐다. 그리고 유예의 핵심엔 고통을 분담하지 않는 프랜차이즈 본사와 환경에 무심한 국가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상공인의 반발을 명분 삼고 있지만 애초에 그들을  힘들게   누구였을까. 벗어날  없는 시스템 속에 몰아넣고 이득만 챙긴  누구였을까.


한때 내 눈을 반짝거리게 했던 일회용 컵은 이제 내 눈을 돌리게 만드는 보기 싫은 쓰레기가 되었다. 감각적인 디자인을 뽐내며 브랜딩 하는 기업도, 당연하듯 일회용 컵을 건네는 매장도,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니며 sns에 인증하는 사람들도 모두 각자 자기만큼의 책임을 쏙 뺀 허상을 쫓는 것처럼 느껴진다.


모든 걸 다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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