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경성에는 물고기가 날아다니는 집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그걸 집이라고 해야 하나? 성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지하 1층에 지상 3층인데 2층에는 막 물고기가 날아다니고, 마당의 연못에서는 뱃놀이를 한다네.”
“그런데 윤덕영이는 왜 그 높은 곳에다 집을 지었나?”
“그 집에서는 경성 시내는 물론이고, 경복궁이 내려다 인다네.”
“저런! 우지랄! 나라 팔아먹고, 일본 왕한테 받은 돈으로 서촌 땅을 다 사들이더니 거기에다 벽수산장을 짓고 왕과 백성을 내려다보겠다는 심보구만! 아주 그냥 쳐 죽여도 속이 안 풀릴 작자구만.”
친일귀족 윤덕영은 종로구 옥인동에 유럽의 성을 연상시키는 대저택을 짓고 자신의 호를 따 벽수산장이라고 지었다. 2층의 바닥을 통유리로 설계하여 1층에서 위를 바라보면 마치 물고고기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1910년, 창덕궁에 순종과 여덟 명의 대신이 모였다. 거리에는 중무장한 일본 군인들이 배치되었고, 데라우치 총독과 이완용의 손에는 한일병합조약 문서가 들려져 있었다.
“짐은 그 요망한 문서에 동의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옥쇄를 내어 줄 수 없다.”
“이미 다 끝난 일입니다. 어서 옥쇄를 내어주십시오. 이렇게 버티신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너희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의 신하냐?”
“어허! 그 참. 저리 사태 파악을 못하시니.”
신하들과 순종이 옥쇄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황후가 옥쇄를 집어 들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 뭐....... 뭐 하시는 겁니까?”
“에헤. 그 참 모양 빠지게. 여봐라. 뭐 하느냐. 어서 황후마마를 붙잡지 않고.”
순종의 정비인 순명효황후는 경술국치를 막기 위해 옥쇄를 들고나가 치마폭에 품은 채 요지부동이었다.
“사람의 탈을 쓰고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하다니. 이 개돼지만도 못한 천박한 것들아! 네 놈들이 아무리 법도를 모른다 해도 감히 황후의 몸에 손을 대지는 못할 터. 나는 죽음으로써 옥쇄를 지킬 것이다.”
“어허! 이렇게 시류를 못 읽으셔야. 마마. 이미 대세는 기울었습니다.”
그러나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들도 감히 황후의 치마를 들 수는 없었다. 그때 의기양양하게 나선 이가 순종의 비서실장 격인 시종원경 윤덕영이었다.
“마마! 그만 일어나시지요. 어차피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괜히 험한 꼴 당하시기 전에 옥쇄를 스스로 내어 주십시오.”
“큰 아버지! 이 나라의 신하이자 종친이십니다. 도대체 어찌 이러시는 겁니까! 돈이 부족하십니까? 그 돈 얼마나 가지셔야 마음이 채워지시겠습니까!”
“어허! 아녀자가 뭘 안다고 남자들 하는 일에 함부로 지껄이시는 게요! 어서 옥쇄를 내놓으시오.”
윤덕영은 황후를 밀치고 옥쇄를 강탈하여 경술국치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했다. 훗날 고종 독살설의 유력한 기획자로 거론되는 윤덕영은 이날의 공로로 귀족 작위와 함께 46만 원에 달하는 은사금을 받았고, 그 돈으로 서촌 땅을 집중적으로 사들인다.
“어디 보자. 서촌만 놓고 보면 내 땅이 이완용의 땅보다 더 넓구나. 이제 한옥 말고 유럽 귀족의 성을 닮은 나만의 성을 지으면 되겠구나. 낄낄낄.”
친일귀족들의 부동산은 수도권과 충남 등에 골고루 걸쳐 있었으며, 윤덕영은 서촌에만 축구장 10개가 넘는 면적의 땅을 사들여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했다.
친일파의 상징인 이완용의 재산에 관한 기록은 1925년 개벽 8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완용의 자산은 적어도 300만 원으로 조선 제2의 갑부이다.”
이완용에게는 나라의 외교권과 주권을 팔아먹을 때마다 은사금이 주어졌으며, 벽수산장 못지않은 3,700평의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이완용과 윤덕영 등이 보유했던 땅과 재산은 해방 후에도 후손에게 은밀히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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