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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락

아주아주 긴 이야기

by 안녕

"기대 안 해요."라는 말은,

분명히 거짓말이었네요.



막상 '탈락자' 명단에서 이름을

보니,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동안 보내온 시절이,

밤늦게 쏟아부은 열정이

흩어지는 것 같아서요.



어제였습니다.

2026학년도 교원연구년이라는 것을

신청했었고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고작 1명 뽑는 자리라

경쟁이 치열하기도 했고,

경력이 아직은 많지도 않아서

확률은 낮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현듯

연구년이 되어서

한 해 정도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 근무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쓸데없이 좋은 상상력은

저를 꽤나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어요.



8:30분에 맞춰 출근하지 않는,

초등학교 앞에서,

아이를 배웅해 주다가

좋아하는 커피 한 잔 테이크 아웃 해서

공원 벤치에 앉아

가만히 책을 보는.

이따금씩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가만히 눈을 감아 보기도 하고,

아직은 쌀쌀한 봄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어디론가 발길을 옮기는

그런.




- 띠링



하고 울린 메시지 속의 제자가

"쌤, 어디세요? 지금 학교 가면 계시나요?"

할 때에 슬며시 미소 지으며



"학교 아니지~ 너 00역 알아?

그리로 올래? 맛있는 거 사줄게."



하는, 뭐 그런 상상을 아주 구체적으로

했었어요.



합격자 조회를 하는데,

순간 심장이 너무 두근거리더라고요.

그때가 월요일 1교시였는데요.

솔직히 말하면 조회하기 싫었어요.

눈앞에 '불합격'이라고 뜨는 걸

보기가 싫었거든요.



결과는 예상대로(?)

불합격이었습니다.

교육청은 너무 친절하게

"다음에 인연이 되면, 또 뵙겠습니다.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문구를 띄워 주더라고요.



와르르 무너지는 마음

붙잡는데 하루가 꼬박 걸렸습니다.

학원 다니는 것을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합격하면

이제 학원 두 개 다 그만둬도 돼, 하고

멋지게 말해주려고 했거든요.



"쌤, 축하드려요. 정말 열심히 하시더니,

좋은 결과 얻으셨어요!!" 하는

축하 인사도 머쓱해하며 받아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모든 것은 그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저는 내년에도 또 똑같은 하루를,

반복되는 야근을

버텨야 합니다.



아이를 돌보아야 하기에

담임교사를 할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조퇴가 자유로운,

하지만 일은 너무나 많은 부장을 할 수밖에 없고,

나에게 주어진 하루는 너무나 짧고

틈을 쪼개 일을 해도 마무리가 되지 않아

퇴근하고 나서,

밤 10시, 혹은 11시를 넘겨서

일을 시작하는, 그런 삶을

보내야 합니다.



숨이 막혀

살짝 눈물이 나더라고요.

연구년을 위해서 버틴 2년이었어요.

사실, 저 승진에도 뜻 없고

저에겐 뭐랄까, 그저 다른 세상 이 이야기예요.



이 학교 오기 전의 저는

그저 하루하루 수업 의미 있게 하고

그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러다가 뜻이 맞는 출판사를 만나 책을 내고

강연을 하다 어느 순간에 학교를 그만두는,

그런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이곳에선

그런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제 여유를 포기해야 합니다.

피곤하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을 여유.

졸리면 마음 편히 잠들 여유.

때로는 조퇴를 하고

친한 사람들과 커피 한 잔 마시며

깔깔거릴 수 있는 여유.

그런 것들을 내어 주어야

겨우, 하루에 길어야 한 시간을 내어,

글을 쓰고 책을 읽을 수 있었어요.



대부분 깊이 생각하지 않고

흐르듯 해온 일이지만

문득, 사무치게 힘들거나

내 안의 모든 것이 텅 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심장이 조여오듯 우울해질 때면

그게 그렇게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1년을 더.

그렇게요?

(심지어 내년엔, 제가 사랑하고 아끼는

아이들이 졸업하고 없습니다.ㅠ.ㅠ)



다시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1년, 제가 해낼 수 있을까요?

탈락은 우울을 가져오고

그 우울은 제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아

점점 가라앉게 만듭니다.



어제는, 그 마음 그대로 애들 만나면

작은 말 한마디에도 툭,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서

참느라 힘들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지금 영상촬영 활동을 지원하고 있고

어제는 무려 6교시 중 5교시가 수업이었던 데다

모든 반이 촬영 장소가 제각각이라서

학교를 또 12,000 보나 걸어 다녔어요.



걷고 걷고 걷다 보니

생각이 사라지더라고요.

도서관도 가고

본관 앞 엘리베이터 앞에도 가고,

가사실, 특별실, 신관 1층,

과학실, 음악실, 운동장, 스탠드, 구령대,

벤치.



학교를 휘저으며

다섯 시간을 걸으니

우울이 옅어졌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오늘을 맞이했고,

몇몇의 선생님들께

탈락의 소식을 알렸습니다.

안타까워하는 눈빛에

위안을 얻으며

오늘도 열심히,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마도

이 글을 쓴 것이

상상조차 안 될 정도로

저는, 내일을 밝게 살아갈 겁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일 제 몫의 일을 해내고

하루의 특별함을 찾고

퇴근길에 분주한 발걸음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향해

갈 겁니다.



그렇게 1년은 흐를 것이고

저는 내년 이맘때 즈음에

그땐 그랬었지, 하며

오늘을 추억하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것은 사실이고

문득문득 우울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 나는 이렇게 힘들게 살까?'

'왜 나는 일을 사서 할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답 없는 질문은

소용돌이가 되어

마음속을 휘젓습니다.

작은 파동에도 쉽게 흔들리는

저는 그 흐름에 그만

중심을 잃고 맙니다.



그동안은

안 힘든 척,

안 우울한 척,

괜찮은 척했는데요.



이번 주만큼은

숨기지 않으려고요.

저 스스로에게요.



안 괜찮거든요.

지금.



깊은 밤이네요.

이 글을 쓰며 하루가 지나가고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합니다.



저는, 얼른 이 두서없는

하소연을 마치고

3년 다이어리 속

11월 25일부터 12월 2일까지의

이야기를 적어보려 합니다.




다들 좋은 밤 보내세요.

별것 없는

평범한 제 이야기를,

이토록 긴,

구구절절한 울적함을

나누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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