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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y 18. 2022

11시의 맛

결코 참을 수 없는 

  밤 11시만 되면 꼬르륵 거리는 소리를 참지 못하고 물을 올린다. 정수기에 기본 설정된 85도의 물로도 면을 익힐 수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컵라면은 주전자에 팔팔 끓은 100도의 물로 익혀야 맛깔난다. 아, 모두 잠든 시간이라면 조금 조심해서 물을 끓이는 것이 좋다. 잘못하면 이 시간에 먹고 내일 또 얼굴 부었다고 징징 거릴 거냐는 엄마의 잔소리와 등짝 스매싱을 당할 수 있다. 라면 물이 끓는 동안 컵라면을 꺼내 비닐을 조심스레 뜯는다. 바닥에 적혀있는 유통기한과 제조일 등을 의미 없이 쳐다보며 뚜껑을 연다. 날짜가 조금 지났어도 먹을 거면서 꼭 한 번 날짜를 확인해준다. 몸을 생각하고 있다는 형식적인 행동일 뿐이다. 사실은. 


  뚜껑은 꼭 절취선까지 열어야 하는데 생각처럼 잘 안돼서 맨날 조금 더 뜯는다. 먹는 데는 지장 없지만 나처럼 약간 강박증이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 약간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다음엔 수프를 뜯어 면발 위에 소복이 뿌린다. 요새 라면은 워낙 수프가 다양하기 때문에 먼저 넣는 건지 나중에 넣는 것인지 꼭 확인해야 한다. 안 그러면 이맛도 저 맛도 아니게 된다. 


  삐이이이익- 주전자가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하면 불을 끄고 물을 붓는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게 있다. 갓 끓은 물을 주전자에서 바로 붓다가 뜨거운 물이 사방팔방 튈 때가 있다. 살살살 쪼로로록 나갈 수 있게 신생아 다루듯 조심스럽게 물을 붓는다. 또 손잡이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주전자는 마감 시간에 들이닥친 단체손님을 바라보는 아르바이트생처럼 열 받아있기 때문에 항상 장갑을 착용해야 한다. 치이 이익- 컵라면 용기에 물이 닿아 나는 소리에 괜스레 행복해진다. 입 안엔 벌써 침이 고여있다. 


  고인 침 한 번 꿀꺽하고 뚜껑을 덮는다. 나무젓가락으로 고정하면 된다지만 난 나무젓가락을 싫어하는 사람이므로 앞접시로 쓸 그릇 하나를 올려놓는다. 적당한 무게감이 있는 게 좋다. 너무 가벼운 것은 그만 뚜껑이 들리고 만다. 그렇게 되면 우왕좌왕하다가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날아가 맛있게 먹을 타이밍을 놓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권장시간은 3분에서 4분. 하지만 나는 성격이 급한 데다 꼬들면을 좋아하므로 2분 30초로 맞춰둔다. 그 사이 냉장고에서 잘 익은 배추김치를 꺼낸다. 봉지라면엔 계란과 파를 넣어먹지만 컵라면은 순수한 상태로 먹는 게 가장 좋다. 알맞게 익은 배추김치 냄새가 위장을 자극한다. 


  어느새 1분밖에 남지 않았다. 개다리소반 하나를 펼치고 김치, 숟가락, 젓가락을 세팅한다. 남은 시간은 30초. 이제 좋아하는 유튜브나 웹툰을 켜 둔다. 자주 먹는 물은 500ml 정도 담아 옆에 둔다. 완벽하다. 이제 10초가 남았다.... 3,2,1! 


  다 됐다! 뚜껑을 연다. 화아악- 앞이 안 보인다. 안경에 낀 습기를 손으로 대충 닦으며 킁킁, 라면 냄새가 삽시간에 퍼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후루룩. 쩝쩝. 그래, 이맛이다! 꼬들한 면발이 입안을 휘감아 목젖을 탁, 치고 넘어가는 맛. 짭짤 매콤한 배추김치와 어우러지는 환장하는 나트륨의 맛.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밤 11시의 맛. 


Photo by sq li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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