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의 역설
선결과 후과정의 메커니즘은 업무적인 성과, 저축, 투자, 인간관계, 자아의 실현, 양육, 공부 등 개인과 사회의 범위를 아울러서 작동하는 것 같다. 목적이나 목표가 생기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어떤 결과물(사람, 부, 업적 등)을 보고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로 연결되고 과정이 시작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큰 목표 속 과정은 작은 목표와 작은 과정으로 알알이 쪼개진다.
예를 들어보자. 작가가 꿈인 사람이 있다. 그에게 소설을 쓰거나 등단을 하는 것은 최종 목표가 된다. 숨이 끊어지지 않는 이상 이후의 행보가 있겠지만 그건 현재 떠오른 최종목표와 무관한 카테고리가 될 수 있고 아직 불확실성이 크니 일단 논외로 하자.
소설을 쓰거나 등단을 하려면 글을 써야 한다. 그러나 이제 막 꿈이 생긴 새내기 작가 지망생은 책상에 충분히 앉아 있어 본 적이 없다. 생각을 활자로 옮기는 것이 어색하다. 아직 무엇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손으로 써야 하나 워드프로세서를 써야 하나 같은 하찮은 고민으로 시간을 보낸다. 문구점으로 가거나 ‘작가 키보드’ 같은 걸 검색해 구입하기도 한다. 이 시점은 과정이 또 다른 목표와 과정으로 쪼개지는 시점이다. 고민 끝에 의기투합한 이 작가지망생은 손으로 쓰든 키보드로 쓰든 동화를 쓰든 시를 쓰든 일기를 쓰든 일단 글을 쓰는 데에 익숙해져야겠다고 생각한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글을 써야지. 10분이든 30분이든 머릿속에 있는 것을 꺼내놔 보는 거야.’ 목표가 생겼고 동시에 과정으로 접어들었다.
이제 순조로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10분에서 30분 오롯이 글에 집중하려면 적어도 20분에서 40분 정도는 기상시간을 앞당겨야 한다. 눈을 뜨자마자 책상으로 달려간다고 해도 말이다. 어찌어찌 피곤한 눈을 뜬 새내기 작가는 누운 상태에서 쓰지 않아야 할 10만 개에 가까운 고민과 마주한다. 불굴의 의지로 고민회로를 불태워 끝내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잠은 깨지 않고 빈화면의 1cm 남짓한 세로줄은 무한히 깜빡이며 도통 옆으로 이동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1일 1 글의 첫날. 그래도 나는 행동했다’ 같은 문장을 써보지만 이런 다짐글 같은 건 소설로 발전할 가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자신이 한심해진다. 위로하고 한심해하는 것을 몇 번씩 반복하며 시간은 지난다. 전업작가가 아닌 지망생은 이제 생계를 위해 출근을 준비해야 한다.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은 문서는 저장도 하지 않은 채 꺼버린다. 새로운 목표와 과정이 쪼개져 나오는 시점이 다시 찾아왔다.
회사에서 일을 하는 내내 오늘 아침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부터 들여야겠다. 시간도 확보하지 못하는데 무슨 글을 써?’ 목표가 생겼고 동시에 과정으로 접어들었다.
일단 여기까지의 여정을 살펴보자. 최종장을 정했고 그리로 가기 위해 당장 해야 하는 일까지 차츰차츰 내려왔다. 세 가지 단계까지만 살펴보았지만 사람에 따라 이 단계는 무한히 생략되고 또 증식될 수 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건강한 과정이다. 이 과정을 현명하게 하는 데에는 목표 보다 더 앞선, 그러니까 목표가 생긴 원인을 되뇌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겠지만 경험상 과정 유지에 핵심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밤샘공부에 가끔 마시는 레드불 정도의 힘일까. ‘유지’의 비결은 잘게 쪼개지며 겉으로 보기에 나를 목표에서 밀어내며 '뒷걸음질 치게' 했던 목표와 과정들을 다시 하나하나 지워가는 데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 ‘성취’ 등에 있다. 머리와 가슴만이 아닌 육체로 느끼는 체감이 함께 해서 그렇다. 결국 큰 목표로 가는 과정은 현재의 나를 낱낱이 까발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큰 목표자체가 주입된 생각인지 진정 나의 욕망인지까지도 차츰차츰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빈화면의 세로커서가 약 400번 정도 깜빡인 후에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