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리즈 돈 트라이 디스 앳 홈
망가진 에어팟이 하나 있었다. 에어팟 1세대가 출시된 시점에 마침 삿포로에 있던 터라 당시 환율로 국내가보다 저렴하게 구입했던 기억이 있다. 노이즈캔슬링도 볼륨조절기능도 무선충전기능도 없던 초기 모델이었지만 귀에 꽂았을 때 나던 착용음을 잊지 못한다. 그 울림은 비록 프로그램된 기계음이었다 해도 타국땅 위에 서있던 나를 또다시 새로운 현실로 접속시켜 주었다. 무선이어폰의 경험이 처음인 것도 그 드라마틱한 감정에 한몫을 했을 것이다. 역사 근처 건물 10층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나는 곁에 있던 연인에게 L이 쓰인 한쪽을 건네주었다. 우리는 백화점과 삿포로 도심을, 골목골목을 그저 목적지 없이 자유롭게 지배했다. 힙합과 락앤롤 신의 가호아래서.
그 뒤로 삼 년 즈음 시간이 흐른 뒤엔 한 사람씩 나눠 듣는 일이 추억 속에서만 가능해졌다. 시간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기계장치는 오른쪽부터 망가져갔다. 들리지 않는 에어팟을 끼고 많이도 달리고 걷고 앉아있기를 반복했다. 내 연인의 귀엔 이제 에어팟 프로가 있고 손가락 짓 하나로 주변소리를 차단하기도 한다. 해리포터에서만 보던 마법사 같다고 생각한다.
왼쪽에서는 아스팔트와 타이어의 마찰음, 귓구멍을 미끄러져 지나가는 일본인들의 수다소리, 미묘하게 낯선 타국의 공기와 빛의 파동이 느껴지고 연인의 재잘거림이 들리는, 오른쪽에서는 장면에 적절한 사운드트랙이 흐르던 그 겨울이 문득 그리워졌다. 나는 그 에어팟을 3년 전 추억의 정수가 담긴 그릇 같은 것으로 생각해 왔다. 새로운 것을 사지도 낡은 것을 버리지도 못한 채 또 몇 달의 시간이 흘렀다.
빨래를 널고 있었다. 불룩 튀어나온 바지 주머니가 의심스러워 손을 넣었더니 매끄럽게 가공된 플라스틱 덩어리의 모서리가 만져졌다. 주머니 속에서 세제물에 잠기고 세탁통 속의 탈수를 견뎌낸 에어팟이 지친 듯 젖어있었다. 그리고 깨끗해져 있었다. 그 뒤로 얼마간 에어팟은 마지막으로 큰 숨을 몰아쉬 듯 다시금 정상으로 돌아왔다. 들리지 않던 오른쪽이 살아났다. 그럴 때마다 삼 년 전의 그 울림은 나를 추억과 만나게 했다.
그렇게 몇 주 정도가 지난 후 빨래통에 들어가기 전보다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