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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찬수 Apr 28. 2023

Hysteria

히스테리아

 깊고 오랜 잠이었다. 포근함을 잃는 것이 두려워 눈을 뜨고도 다시 돌아가려 끙끙대보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D가 침대맡에 두고 간 초콜릿을 누운 채로 몇 개 집어먹었다. 저녁도 먹지 않고 잤으니 어제 점심 이후 먹는 첫끼였다. 배가 금세 더부룩해져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이 잠은 멀리 달아나 버렸다. 사라진 후에 아쉬움이 남지 않는 것을 보니 꽤나 최선을 다해 잤나 보다. 우울증에 걸린 뒤로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요즘 들어 깨끗한 날씨가 지속되고 있다. 흐린 날이 질투를 하는지 바람은 꽤 거세지만.


  멀리 보이던 산능선이 매끈한 곡선에서 톱날처럼 변했다. 뭉뚱그려 윤곽으로만 보이던 나무들의 굵은 가지와 이파리들이 하나하나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 초록빛을 무대 삼아 서서 햇살을 하사 받는 일은 깊고 오랜 잠 못지않게 힘이 난다. 비가 오는 날이면 연인과의 저녁약속이 갑자기 취소된 하루처럼  깊은 그리움과 아쉬움에 하루를 보내곤 한다. 어떤 날은 가슴이 아리기도 하다. 그래도 비가 오는 날이 마냥 재미없지만은 않다. 애매하게 발이 젖는 불쾌감, 아무리 옷을 입어도 피부에 직접 가닿는 으슬함, 성가신 우산, 시작되자마자 하루를 끝내버릴 기세로 몰려온 먹구름, 공조기를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없어지지 않는 차창의 김서림 같은 것들은 그저 샤워 후의 개운감을 증폭시켜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겨우 샤워 같은 걸 생각하며 하루를 버틴 다는 것은 좀 이상하게 들릴까? 그러나 축축해진 몸과 기분을 이끌고 욕실에 들어갔다 나와 몸과 머리를 말리고 있으면 그 행위 자체로 뭔가 날씨에 대항하고 있다는 기분 좋은 고양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랜만에 산뜻한 마음으로 글을 써보려 카페에 나왔지만 밀려오는 사람들에 빌붙어 찾아온 공황증상 덕분에 반나절의 나열정도밖에 안 되는 이 짧은 글을 꽤나 고군분투하며 쓰고 있다. 맑은 날씨로는 조금 부족해서 뮤즈의 도움을 조금 받고 있다. 그 그리스 예술의 여신을 말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난 여신의 도움을 입맛에 맞게 가져올 정도로 고귀한 존재가 아니니 동명의 서양밴드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 여신을 알현하는 것은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모르지만 이 시대 명밴드의 전언은 오늘날 너무나도 쉽게 입맛에 맞게 골라들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why not’이다. 바람이 햇살도 식혀버릴 기세로 꽤나 심술이 났다. 등나무꽃이 안쓰럽게 흔들리고 있다. 조금 힘을 내주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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