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현재장르는?
무언가를 매일 지속하는 일의 성패는 변수에 대한 대응능력에 달려있다. 최근 매일 아침 글을 남기는 일에 기상시간이나 날씨, 아침의 컨디션 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잠이 빨리 깨고 기분을 환기하는데 도움을 주는 등 나의 삶에 밝은 면을 자꾸 비추어주고 있었다. 이렇게 일상의 작은 변수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여 분명함을 만드는 일은 점차적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 큰 변수에 대항할 정도의 힘은 역부족이었다. 습관의 방향성이나 방법론 자체의 나약함은 아니다. 우울증과 반복되는 공황발작, 그로 인해 수년간 뒤쳐진 커리어와 경제력, 자존감 따위를 안고 살아가는 나의 일상은 대출문제나 결혼, 커리어 따위의 육식동물들 앞에서는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듯한 가젤이었다.
어제는 나 자신이 너무 작게만 느껴졌다. 내가 걸어야만 하는 길이 너무나도 무서워서 차라리 세상을 몰랐으면 싶었다. 제자리에 맴돌더라도 우물밖세상을 모르면 그 안에서도 행복은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내가 그리도 무섭게만 느끼는 길을 다른 이들은 잘도 웃고 떠들며 걸어간다고 질투했다. 처음에는 이 감정과 생각들을 잠재워보려 책상 앞에 앉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깟게 다 무슨 소용이야.’하고 현재를 만든 과거의 무수히 많은 노력의 점들을 폄하하기 시작했다. 이야기 속 만나면 피하고 싶은 인물처럼 내 캐릭터를 계속 재창조해냈다. 이 행동이 실제 이야기와 유일하게 다른 점은 캐릭터를 나로부터 종이 위에 분리시켜 놓을 수 없다는 점이었고 그것이 나를 계속 힘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다른 역할을 맡던지 연기에서 벗어나 나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어떤 쪽이 나란 말인가? 모두 내 뇌에서 나의 행동으로 인식하는 일들이지 않은가? 한쪽만 나라고 선택하는 일은 더 위험해 보였고 그것은 실제로 자신의 모습 중 하나를 부정해 버리는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제3의 눈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히어로도 있고 히로인도 있다. 행인 1도 있고 운전수 1도 있다. 악당도 있고 악마도 있다. 사기꾼도 있고 놈팽이도 있다. 부자도 있고 빈자도 있다. 꼬마도 있고 늙은이도 있다.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다. 육체노동자도 있고 화이트칼라도 있다. 백수도 있고 재벌 2세도 있다. 하나님도, 부처님도, 시바신도 있다. 종교인도 있고 무신론자도 있다. 자본가도 있고 노동자도 있다. 예술가도 있고 과학자도 있다.
나는 숨 쉬는 동안 이 모든 인물들에 깊이 접속한다. 내 삶의 이야기는 여러 번 쓰일 것이다. 죽어서야 드러나는 플롯. 우리 삶은 가까이 보면 옴니버스이나 멀리 보면 결국 서사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