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글을 쓸 때는 아침보다 키보드에 손을 얹기 전까지의 준비과정이 조금 길어진다. 낮동안 많은 사람들과 상황들에 뒤엉켜 세상이라는 믹싱볼에서 갓 튀어나와 책상 앞에 툭 떨어진 나의 머리 위에는 작은 별들 세 개가 돌아가고 있다. 나는 지지직 거리는 브라운관 tv가 된 것 마냥 안테나를 길게 늘여 뽑고 계속해서 채널을 맞추려는 노력을 한다. 내 마음의 문 밖에선 검정복면을 쓰고 청진기를 갖다 댄 남자가 서서히 다이얼을 돌린다. 잡음이 없어지고 어딘가 한 이미지나 소리가 선명해질 때까지. 퍼스널스페이스를 중요시하고 생각의 프라이버시가 일종의 무기인 나는 누가 본다면 이런 예리하고 섬세한 작업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하게끔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가끔가다 고개만 갸웃거리면서 어딜 보고 싶은지 파악불가한 눈으로 앉아있곤 한다.
그러다 보면 이내 잠이 깨거나 눈꺼풀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생각의 속도가 빨라지며 예리해진다. 의욕이 생긴다. 무엇보다 문제나 고민이 있다면 감정에 덜 지배된 상태로 마주하게 된다. 에세이든 소설이든 여기까지만 해도 ‘쓰는 행위’ 자체의 효과가 어떤지 누구나 쉽게 겪어볼 수 있다. 재미없어 뵈지만 나름 중독되기 쉬운 강렬함이다. 드라마틱하지 않고 ‘일상적인 수준’의 강렬함이라 더 그렇다.
그럼 그 주파수가 언제 맞냐 하고 물어본다면(키보드에 손이 언제 올라가냐 하면) 나는 모른다. 한 시간일 때도 5분일 때도 있어서 특정하기는 좀 곤란하다. 분명한 것은 이러고 있다 보면 언젠간 맞는다는 과거의 데이터와 내 직감뿐이다. 추천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고 그저 나는 이렇게 한다. 보장된 건 아무것도 없다. 과연 보장된 것이 있기나 할까. 나는 단지 판을 깔고 있는 것뿐이다.
보통 가만히 앉아 멍하니 있고 가끔 좀이 쑤신날은 비슷한 시간 동안 좀 걷는다. 그러다 보면 흐린 안개가 걷히는 듯한 촉감이 찾아오는 것뿐이다. 사실 일상적으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나는 그 ‘상태’를 이용해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뿐이다. 목적 있는 의식적인 행위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아마도 짐작컨대, 의식적일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렇게 의식이 날뛰기 좋을 것 같은 환경이랍시고 만들어놓으면(멍하니 있기, 명상하기, 운동하기 등을 통해) 항상 무의식이 자리를 선점한다. 항상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술술 말하는 것이 먼저고 딴지를 거는 것은 나중에 찾아오는 의식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