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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샤인 Oct 10. 2024

학벌에 대한 고찰

Winner takes all

흑백요리사가 그렇게 재미있다고 회사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얘기하길래 시간을 내어 4화 정도까지 시청을 했었다. 100명을 수용하는 압도적인 스케일의 참신한 시도, 요리에 대한 진심, 간절함, 주관적인 수도 있고 객관적일 수도 있는 평가 등등 분명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았다. 그런데 왠지 불편했다.


무엇이 불편했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람의 노력에 대한 가감 없는 평가가 불편했다. 더 곰곰이 생각해 보니 누가 저 미슐랭 쓰리스타에게 평가를 할 권한을 주었고 저 권위가 무엇이길래 각자의 매력이 한 입에 무시당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불편했던 것 같다. 물론 1화 때 이 룰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은 나갈 수 있었지만 그냥 이 룰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난 어쩔 수 없는 반동분자인가.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내가 불편했던 진짜 이유는 이 프로그램에서 한국 경쟁사회의 쓴 단면을 봤기 때문이었다. 하다하다 내가 얼마든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요리까지 경쟁을 시켜서 굳이 최고를 뽑아야 하나, 뭐 참가자들도 홍보의 이익이 있고 넷플릭스는 시청률 올리고 윈윈이지만 정작 그 프로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열광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내재된 경쟁심리로 인한 대리만족인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는 아니라고 하면 당신이 전적으로 옳다).


오늘 얘기하고 싶은 학벌에 대한 이야기도 같은 맥락인 것 같다.




난 학부와 박사 학위를 같은 대학에서 마쳤다. 나름 한국에서 인재소리 듣는 학교였지만 학교 내에서는 그놈이 그놈이기 때문에 학교 밖에서 인정받는다는 소문은 들었다만 밖에 나갈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다.


보스턴으로 포닥을 나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한국사람이라도 너 서울대? 난 카이스트. 너 하버드? 난 MIT. 같이 여전히 그놈이 그놈인 세계였기 때문에 '학벌'이라는 것이 좋은 간판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닥 실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쌍둥이가 태어나고, 급히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고, 한국 회사에 취직을 하고 보니 한국 사회가 얼마나 이 학벌에 민감한지 실감 중이다. 나야 수혜를 받는 입장이어서 이 학벌주의에 대해 감사해야(?) 할 수도 있겠지만 해도 해도 너무 과도하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든다.


좋은 학벌, 소위 좋은 학교 출신이라는 것은 공부를 잘했다는 말이다. 공부를 잘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성실하게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는 말이기도 하고, 유혹이 많은 십 대 시절을 묵묵히 인내했다는 말도 된다. 어느 정도 보상받을만하다. 하지만, 적절한 보상이라는 나의 상식과 실제 학벌에 대한 보상은 그 간극이 큰 것 같다. 한국에서는 좋은 학교 출신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지식적 탁월함을 훌쩍 넘어 그 사람 자체에 대한 매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느낀다. 심지어 죄를 지어도 그 죄의 사회적 무게가 훨씬 덜 한 느낌.


계급화되는 느낌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등급을 나누어 평가하는 느낌이다.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난 귀족, 넌 평민, 쟨 천민. 철없는 대학생들의 편 가르기라고 생각했던 내가 오히려 나이브했었다. 사회에 나와보니 그 계급이라는 것이 편 가르기가 아닌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최소한 드러나는 것만 봐서는 모두가 암묵적으로 이 계급화에 동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럴까. 경쟁 방식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패자들을 밟고 올라가는 이 방식이 왜 당연해진 것일까. '공정'하다는 경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승리한 만큼만 취하면 되는데 Winner takes all, 승자독식이 되는 것이 문제인가. 역사적으로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 가운데 무능하고 이기적인 통치자들을 겪다 보니 생존 DNA가 각인이 되어서 그런가, 그래서 각자도생의 유전자가 우리 모든 한국인들에게 흐르고 있는 것인가. 모든 영역에서 경쟁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 경쟁에서 이기는 자가 승자이고 모든 것을 독식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뉴스에서 갑질하는 사람들 뉴스가 나오면 그리 욕을 하지만 내가 갑의 위치에 있을 때 과연 그 모습과 얼마나 다른가. 반대로 갑질을 당하는 을의 입장에서 갑에게 적당히 하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회 구조가 안타깝다. 그 한마디 하려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구조이니까.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일 수도 있겠다.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쟁취하지 않으면 죽게 되고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지 못하니까. 하지만 인간이 동물과 구분이 되는 것은 그 생물학적 본능을 뛰어넘는 가치, 신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멀리 가지 않더라도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일제와 독재에 맞서 죽음까지 불사한 우리의 조상들이 있지 않은가. 모두가 그런 용기 있는 자가 되지 않더라도 그런 자들이 인정받는 사회를 지향하도록 만드는 것이 사회의 리더들의 책무일 텐데, 정작 표를 얻기 위해 남녀를 갈라치고, 세대를 갈라치고, 이념을 갈라치는 것을 보면 암울해진다.


어디에서 가치를 찾아야 하는지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무엇이 가치로운가?'에 대해 사회가 명확히 정의 내리지 못하는 시점에서 직관적으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는 것 같다. 압도적으로 돈이 많은 사람(재벌) 혹은 돈 걱정이 없는 사람(건물주), 사회적 지위(국회의원) 혹은 인기가 많은 사람(유재석)을 동경하는 사회적 분위기이지 않은가. 아니, 최소한 그렇게 되도록 미디어들이 몰아가고 있지 않은가.


학벌도 이러한 맥락에 닿아 있는 것 같다. 갈라치기도 쉽고, 소위 '공정'한 경쟁의 승자이니 제한된 자원을 합당하게 쟁취할 수 있고, 그러다 보니 좋은 직장, 좋은 인맥에 쉽게 연결되어 돈도 잘 벌고 사회적 지위상승도 상대적으로 쉽게 되는 지름길이 이 학벌인 셈이다. 그리고 이 학벌은 높은 확률로 자녀세대에게 대물림 된다.


문제는 나누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다. 도덕적 책무, 사회에 대한 책무가 없다. '공정하다는 착각' 책에서 나온 것처럼 내가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을 위시한 사회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인데 오롯이 나의 힘만으로 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설사 내 힘만으로 이루었다 할지라도 이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가진 자들이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 모두가 사장놀이를 하면 누가 택배를 배달해 주며, 누가 화장실과 거리를 청소해 주며, 누가 대중교통을 운행한단 말인가.


모두가 잘 사는 사회가 되었을 때 내가 더 잘 살게 되는 것인데, 모두가 잘 살게 되면 내 파이 지분이 많이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가 잘 살게 되면 내 파이 지분은 줄어들지만 파이가 훨씬 커지게 되기 때문에 절대량으로는 오히려 더 많이 얻을 수도 있다는 사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모두가 불행한 사회에 사는 것보다 모두가 행복한 사회에 사는 것이 훨씬 즐겁지 않을까?


의식의 흐름대로 써 봤다. 학벌문제로부터 대두되는 이 계층화, 격차의 문제는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 문제인지 감도 오지 않는다. 하지만 차근차근 생각해 보려 한다. 그리고 좋은 모델을 찾아보려고 한다. 위에 언급한 수많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냉혹한 계급화 속에서도 소리 없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나도 그러한 나무가 되리라 다짐해 보며 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행동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려 한다.


정치를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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