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날 꿨던 꿈
정신없이 한국에 적응하다 돌아보니 어느덧 10월 29일이다.
159명의 인생이 서울 한복판에서 스러졌던 날.
그때 꾸었던 꿈을 추모의 마음으로 기록해 본다.
2년 전 오늘, 난 미국에 있었다.
한국시간으로 2022년 10월 29일은 토요일 밤이었으니 미국시간으로 토요일 오전이었다. 주말이라 늦잠을 잤지만 개운하지 않았던 것은 밤에 너무 생생하면서도 심란한 꿈을 꾸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난 종종 꿈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할 때는 그 꿈을 기록해 놓는다. 많은 확률로 기록해 놓는 꿈들은 후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곤 한다. 10월 29일 꾸었던 꿈도 그러했다.
꿈속에서 난 젊은 여자 두 명과 함께 검은색 정장을 입은 요원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이들이 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차 뒤에 웅크려 숨어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 갈라지기로 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여자 한 명이 나를 붙잡고 말했다.
"우리 흩어졌다 저 호텔에서 다시 만나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딱 세 마디를 더 했다. 영어로.
"Mid-night, mid-way, out of town"
그리고 그 둘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나는 잠에서 깼다.
일단 나는 쫓기는 꿈을 초등학생 때 이후로 거의 꾼 적이 없다. 함께 쫓기는 꿈은 더더욱 꿔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도 잠에서 깼는데도 여자가 남긴 마지막 세 마디가 뭔가 메아리치듯이 계속 내 머릿속에 울렸다. 밋나잇, 밋웨이, 아웃오브타운.. 뭔가 라임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워낙 생생해서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커뮤니티 게시판에 들어가서 무슨 일들이 있었나 살펴보는데 갑자기 이태원 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다는 게시글이 올라와 있었다. 이때 시간이 대략 10시쯤 되었던 것 같다. 한국시간으로는 밤 11시, 이미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무슨 일인지 뉴스를 검색해도 나오지 않길래 소식이 가장 빠를 것 같은 트위터로 접속해서 '이태원'을 검색해 봤더니 뭔가 대규모 인파들이 등장하는 영상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난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올라온 영상들은 사고 현장을 여과 없이 담은 거의 실시간 영상들이었다. 이태원 골목에 사람들이 짓눌려 있는 영상, 그 골목의 밑부분에는 사람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영상들을 보고야 말았다. 영상이 모자이크 처리되거나 삭제되기 전이라 그 현장을 생생히 보게 되었다. 살려달라고 우는 사람, 겨우 숨을 쉬고 있는 사람, 이미 질식해서 파랗게 질린 사람, 생지옥이라는 표현 외에는 그 광경을 설명할 수 없었다.
넋 놓고 폰을 들고 있는데 사망자 수가 계속 올라간다. 10명, 30명, 50명, 90명..
뭔가 비현실적이었다. 그냥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현실이다. 저 숫자는 실제 한국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아니 백만 명이 광화문에 모여도 사고 한 건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다 뉴스 속보가 떴고 기사를 읽던 중 사고가 난 장소가 이태원 골목, 해밀턴 호텔 옆 골목이라고 하는 부분을 읽는데 갑자기 꿈이 생각나 헉 했다.
'호텔에서 보자, Mid-night, mid-way, out of town'
사고가 난 곳이 해밀턴 호텔 옆(호텔에서 보자),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시각은 자정 즈음(mid-night),
사고는 골목길 한가운데서(mid-way),
자신이 살던 곳이 아닌 다른 장소(out of town)
이태원 참사 희생자 중 여성이 98명, 남성이 56명으로 여성이 약 2배가량 많다. 그래서 꿈에 여자들이 나온 건가.
2년이 지난 오늘 꿈속에서 봤던 그 여자들의 슬픈 눈빛을 기억해 본다. 전국민적인 트라우마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이 꿈 때문에 더욱 개인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정부의 근조 단어 없는 검은 리본, 영정 없는 분향소, 공개하지 않은 희생자 명단 등 어떻게든 사건을 축소하고 희생자들을 감추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보며 왜 이 꿈을 꿨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자기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러 왔던 것이다. 꿈속에서라도 찾아와 자기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난 그날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기억의 힘은 크다.
세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 생때같은 자식들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생각하면 미쳐버릴 것 같다.
루하나 세아 혹은 노아가 그런 참변을 당한다면 어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세월호 때도 그렇고 이태원 때도 그렇고, 부모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이유는 자식들의 죽음이 납득이 되어야 비로서 그들을 떠나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진정한 애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끝까지 기억하며 지켜볼 것이다.
기억의 힘은 크다.
그 이름들을 기억하며 한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