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당연하지!”
엄마가 3개월~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응급 수술과 1차 항암으로 1달이 후다닥 지나갔다. 바다가 보고 싶다는 엄마의 말에 바다 뷰 숙소를 1주일 예약했다. 엄마는 여행 갈 생각에 들떠 있었고, 나는 몸과 마음이 분주했다. 모든 짐을 싣고 출발하려는 찰나, 엄마가 쓰러졌다. 트렁크에 여행 짐을 실은 채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입원으로 3박 4일이 지나갔다. 엄마는 병원에서도 오로지 강릉 바다 여행 생각뿐이었다.
“너무 늦었지? 못 가려나?”
“지금 가면 돼. 엄마만 괜찮으면.”
“그래? 갈까?”
퇴원과 동시에 우리는 강릉으로 출발했다. 여행에 대한 기대보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또 쓰러지면 어떡하지? 혹시 여기서 엄마가 죽는다면?’ 온갖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거기도 병원은 있어. 응급실 가면 돼. 죽더라도 바다는 보고 죽어야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잔뜩 긴장한 채 세 시간을 운전했다. 장루를 한 엄마는 한 시간에 한 번씩 휴게소를 가야 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휴게소에서 장루를 비웠고, 엄마의 컨디션을 세밀히 살피며 긴장한 채 운전을 했다. 병원에서 쪽잠을 자고 바로 출발한 터라 피로감이 상당했다.
일주일의 절반이 허망하게 사라졌지만, 3일만으로도 충분했다. 엄마는 거실 통창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그 아래 넘실대는 짙은 녹색의 바다를 보며 잔잔히 웃었다. 엄마의 잠자리를 세팅하고 나는 쓰리지 듯 잠이 들었다. 엄마는 곤히 자는 내가 안쓰러워 수술 후 처음으로 혼자서 장루를 비웠다. 내가 일어나 나오자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이제 장루 혼자 비울 수 있어. 너 쉬어.”
오랜만에 듣는 생기 있는 목소리였다.
준비해 온 음식으로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났다.
“엄마, 쉬어. 내가 할게.”
“바다 보니까 힘이 솟는다. 내가 할게. 설거지하고 싶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다가 엄마에게 에너지를 전달한 걸까? 엄마는 소녀 마냥 해맑았고, 목소리에서 설렘이 느껴졌다. 싱크대에 양 팔꿈치를 걸치고 구부정하게 서서 설거지를 하는 엄마 뒤로 펼쳐진 바다가 느리게 흘러가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사진을 찍었고, 그런 나를 바라보며 엄마는 웃었다.
엄마의 방은 침대 머리맡 위로 확 트인 바다와 하늘이 보였다. 침대에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엄마의 얼굴은 바다처럼 평온했다. 다음날 오후, 이모와 외삼촌이 도착했다. 남동생은 부산에서, 여동생은 서울에서 엄마를 만나러 왔다. 엄마는 동생들이 오자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 동생들이 준비해 온 음식을 먹고, 식후에는 병실에서처럼 화투를 쳤다. 남매들은 엄마가 환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 엄마도 이에 질세라, 열심히 고를 외치며 화투를 쳤다. 남매와 함께 있으니 어릴 적 엄마로 돌아간 듯했다. 남매끼리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오~쌓았다! 쌓았다! 대박이다"
"이거 왜 3개야? 누가 가져간거야?"
"와하하하하하"
저녁을 먹고 밤바다를 보러 나갔다. 엄마와 이모는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천천히 모래사장을 걸으며 파도 소리를 들었다. 엄마와 이모의 뒷모습은 왠지 모르게 뭉클했다. 쓸쓸한 밤바다가 민 씨 남매들 덕분에 웃음으로 가득 찼다.
이튿날은 민 씨 남매들은 유행하는 네 컷 사진을 찍고, 강릉 전통시장을 구경했다. 평균연령 70세의 네 컷 사진은 특별했다. 비좁은 공간에서 남매는 어색하면서도 즐겁게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쌓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흡족했다.
딸이랑 보는 바다는, 남매랑 보는 바다와 다르구나. 이모와 외삼촌이 방문하지 않았다면, 엄마는 딸에 대한 의무감으로 이 바다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 거리를 한걸음에 달려와준 이모와 외삼촌이 너무 고맙고 감사했다.
마지막 날 우리는 커피숍에서 강릉 커피를 마셨다.
“이렇게 맛있는 커피가 있네.”
엄마는 한 모금 한 모금을 음미하며 커피를 마셨다. 다시는 맛보지 못할 커피라도 되는 듯이. 이모와 헤어지며 자매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이모 품에 안긴 앙상한 엄마는 외할머니의 품에 안긴 듯 편안해 보였다. 이모와 외삼촌은 떠나고, 남편과 큰아이가 내려와서 우리 식구끼리 밥을 먹었다.
남편이 오자 긴장이 풀렸는지, 나는 심한 복통과 오바이트로 응급실에 다녀왔다. 유사시 엄마를 데리고 가려고 했던 그 병원에 내가 간 것이다. 링거를 맞고 약을 처방받아 왔다. 다행히 서울로 갈 때는 내가 운전하지 않아도 돼서 마음이 한결 편했다.
목숨 걸고 출발한 바다 여행은 그렇게 무사히 마무리가 되었다. 강릉 바다와 파도, 네 컷 사진과, 강릉시장은 엄마가 투병하는 기간 동안 삶의 에너지가 되었을까? 엄마는 마지막일지 모르는 그 바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강릉에 가면 엄마가 더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