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꿉친구의 배신
“가방이 없어졌어!”
언니가 엄마에게 사준 명품 가방이 사라졌다. 암 선고 후 6개월 만에 들린 엄마 집은 쓸쓸하고 허전했다.
엄마는 15년간의 황혼육아를 마치고, 어릴 적 고향 친구가 살고 있는 고양시 내유동으로 거주지를 정했다. 가족들이 반대했지만, 엄마는 친구를 믿고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갔다. 나는 퇴직금 명목으로 이사 갈 집의 인테리어를 선물했고, 새 집에 들일 살림 살이도 하나 하나 준비했다. 73세인 엄마를 시집보내는 기분이었다. 엄마도 나도 설레고 신이 났었다. 우리는 새것 같은 중고를 당근 마켓에서 알뜰 거래를 하기도 했다. 엄마를 위한 당근 거래는 처음이었다.
고향 친구와 엄마는 커서 꼭 같은 동네에서 살자고 약속을 했었다. 엄마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유동으로 간 것이다. 초반 6개월은 엄마도 만족해했다.
“영숙아, 밥 먹자.”
친구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엄마를 챙겼고,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즐겁다고 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사람들과 결이 맞지 않다며 엄마는 피곤해 했고, 피하기 시작했다. 60여 년을 따로 살아온 그 친구는 어릴 때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니었다.
남의 집에서 부엌일을 하며 젊은 시절 고생을 많이 한 엄마 친구는 겉치레를 좋아했고, 자식들로부터 챙김 받는 엄마를 질투했다. 그래서 언니와 나는 엄마 선물을 살 때 하나 더 구입해서 보내곤 했다. 명절 선물도 당연히 챙겼다. 그러나 엄마는 점점 고향 친구가 불편해졌고, 적당히 거리를 두며 살았다.
2023년 5월의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너희 집에서 지내면 안 될까?”
좀처럼 부탁을 하지 않는 엄마가 이상했다. 작년 겨울부터 소화가 안된다고 해서 한의원 다녀왔다. 한의원에서는 노인성 질환이라고 말했고, 체력 보강을 위해 고급 보약을 처방했다. 그러나 엄마는 그 보약을 다 먹지 못했다. 오히려 엄마에게 독이 되었다.
복수가 찬 엄마의 배를 보고, 응급실로 갔다. 2주가 넘도록 퇴원을 하지 못했고, 3주가 되어서야 병명이 나왔다. 대장암 말기. 진단 후 장폐색이 와서 응급으로 장루 수술을 했고, 항암치료로 이어졌다. 엄마의 기대 수명은 3개월~6개월. 손이 덜덜덜 떨리고, 무서웠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줄게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가정간호를 하기로 하고 퇴원 후 여벌 옷을 챙기러 5개월여 만에 내유동으로 갔다. 엄마는 오자마자 장롱을 열어 이것저것을 찾았다. 엄마는 황급히 소꿉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가 가방 가져갔냐?”
“영숙아 그거 내가 가져갔다.”
“그 가방 큰 딸이 사준 명품 가방이다. 안 그래도 너 주려고 했는데, 먼저 가져갔냐, 좀 기다리지 그랬냐. 이왕 가져간 거 잘 써라.”
엄마는 한술 더 떠서 약간의 분노를 담아 말했다.
“모피코트도 가져 가지 그랬냐? 그것도 비싼 건데…….”
“안 그래도 입어봤다. 나한테는 크더라.”
엄마 친구의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엄마도 허탈한 표정이었다. 본인이 직접 주는 것과 타인이 장롱을 뒤져서 찾아가는 것은 다르니 말이다. 6개월 만에 들린 집은 휑했다. 전자시계도, 엄마의 가방도, 쌀도 없었다. 엄마가 진단을 받고, 냉장고에 있는 음식이 걱정되어 친구에게 음식이 상하기 전에 가져다 먹으라고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 친구는 음식만 가져간 게 아니었다.
전화를 받고 그분이 집으로 뛰어왔다. 신발장에서부터 엉엉 소리 내어 울면서 달려와 엄마를 안으며 말했다.
“영숙아, 너를 살아서 보는구나. 너 죽을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가져갔다.”
후안무치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도둑질을 해놓고, 사과 대신 ‘죽을 줄 알아서 내가 가져갔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하루하루를 버티는 엄마에게 상처 주는 ‘너 죽을 줄 알았다’ 이 말에 더 화가 났다. 그 친구는 곧 죽을 줄 알았던 엄마가 살아 돌아와서 반가운 게 아니라 놀랍고, 불안했던 것이다. 3개월에서 6개월 선고를 받았으니, 엄마 친구는 당연히 그 기간에 엄마가 죽을 것으로 기대했나 보다. 나는 경찰에 신고하자고 엄마를 설득했다.
“엄마! 이거는 도둑질이야. 경찰에 신고하자.”
“내버려 둬라. 이사 오고 엄마 잘 챙겨줬어.”
“아우~열받아. 내가 보고 있는데 그 아줌마는 창피한 것도 모르나 봐.”
“됐다. 그만해라. 먹고 떨어지라 그래. 사람 잘못 본 내 잘못도 있다.”
엄마는 부처라도 된 듯, 엄마 친구의 허물을 덮어주었고, 식사 대접까지 하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밥을 먹는 내내 나는 눈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기를 열심히 먹었다.
24년 4월 12일.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엄마의 지인들에게 엄마의 작고 소식을 알렸지만, 가방을 훔쳐 간 아줌마는 장례식장에 오지도, 문자 한통 조차도 없었다. 내 분노는 훔쳐 간 명품 가방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엄마에게 상처를 주고, 배신한 것, 속상하게 한 것 그것 때문이다. 투병 기간의 하루하루는 건강한 사람의 일 년과 같다. 그런데 엄마는 그 친구 때문에 한 달간 속앓이를 했고, 자기 자신을 자책했다. 난 그 시간이 아깝고, 화가 났다. 달라고 말했으면, 엄마는 순순히 줬을 텐데, 굳이 훔쳐 가야만 했을까. 믿었던 사람이 진짜인지 확인하는 순간은 결국, 그 사람이 내가 위기의 순간에 어떻게 행동하는지로 확인할 수 있다. 엄마의 믿음은 그렇게 명품가방과 함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