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간의 가정간호를 끝으로 엄마는 한파가 한창인 1월에 호스피스병원에 입원했다. 아이들과 나는 의사, 간호사, 요양보호사 선생님들의 뇌물용 간식을 준비하고, 박스에 부탁의 말을 메모했다. 요양보호사가 박스를 사진 찍으며 말했다.
“저희 간식까지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동이에요.”
그들은 엄마와 간식 박스를 반겼고, 우리의 작전은 성공이었다. 가족들보다 더 오랜 시간 같이 있을 의료인들에게 환심을 사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주말마다 아이들과 함께 면회를 갔다. 눈이 와도 비가 와도 갔다. 시간은 단 30분. 우리 가족은 순번을 정해 번갈아가며 병실로 들어갔다. 짧은 시간 동안 엄마에게 일주일 동안 살아갈 힘과 용기를 북돋워야 하는 미션을 수행하듯 매 주말 무엇인가를 계속 시도했다.
‘나는 왜 미션을 수행하듯 그렇게 했을까?
그게 엄마가 바라는 것이었을까?
나는 죽어가는 엄마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그랬던 것일까?’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 나의 행동들에 대해 의문이 든다. 당시에는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엄마를 위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다시 그때도 돌아간다면, 그저 엄마의 따뜻한 손을 잡고, 아무렇게나 흩어져버린 엄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내 가슴에 꼭 안아주고 싶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올수록 엄마는 무서워했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허접한 위로의 말 뿐이었다.
“엄마 무서워? 아빠가 마중 나올 거야..”
온 세상이 하얗게 덮인 창문 밖 풍경은, 따뜻한 병원과 대조적이었다. 병원에만 있는 엄마는 날씨도 계절도 다 잊은 듯했다. 아이들은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패딩을 벗고, 할머니 침대로 가서 손을 잡았다. 손주들의 언 손을 잡고서야 말했다.
“밖에 춥니?”
쉼 없는 노동으로 닳고 달아 없어진 지문과 갈라진 손끝, 비쩍 말라버린 거친 손으로 손주들의 얼굴과 손을 한없이 쓰다듬었고, 앙상한 그 손으로 꽁꽁 언 아이들의 손을 정성스레 녹여주었다. 엄마는 본인의 아픈 몸 보다, 아이들의 언 손이 더 마음이 쓰이고 속상했던 것이다. 엄마와 벽에 걸린 사진들을 보며 같이 웃고, 이야기를 나눴다. 때로는 누워서 손주들이 준비한 공연을 보기도 했다.
작은아이가 클라리넷으로 ‘섬집 아기’를 들려주면, 엄마는 흥얼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이 애잔한 동요를 엄마는 좋아했다. 병실에서 클라리넷 소리가 울려 퍼지면, 엄마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을 하며 뿌듯해했을 것 같다.
‘내 손주가 신기한 악기로 이런 멋진 공연을 한다오’
큰아이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현철의 ‘내 마음 별과 같이’를 클래식 기타로 연주를 했다. 빠른 박자의 노래이지만, 손녀의 손끝에서 나오는 멜로디는 여느 발라드처럼 느릿느릿했다. 그날은 엄마가 기운이 없어서 노래를 흥얼거리지 못하고, 침상에 누워 발가락으로 까딱까딱 겨우 박자만 맞추었다. 손 못지않게 갈라지고 딱딱한 엄마의 발은 그 어느 때보다 애잔했다.
깡마른 상반신과 달리 허벅지부터 발과 다리는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그 부푼 다리가 나는 불안했다. 억세게 커져버린 엄마의 발톱 위로 초록색의 매니큐어가 지난날의 추억으로 흔적만 남아있었다.
“산노을에 두둥실
홀로 가는 저 구름아
너는 알리라 내 마음을
한 송이 구름 꽃을 피우기 위해
떠도는 유랑별처럼
내 마음 별과 같이
저 하늘 별이 되어 영원히 빛나리”
엄마는 이 노래를 자주 불렀었다. 그때는 이 노래가 맛깔난 트로트구나 하는 생각만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엄마도 노래 가사처럼 저 하늘의 별이 될까 봐 나는 두려웠다.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엄마는 느끼고 있었다. 손녀의 기타 선율이 엄마에게 한줄기 위로가 되었을까.
삼우제날 엄마의 묘지에서 울려 퍼지는 '섬집 아기'의 선율은 그 어느 때보다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