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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외출

by 윤슬

호스피스병원에서의 외출은 흔치 않다. 흔치 않기 때문에 어렵기도 하다. 엄마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의사와 면담을 하고, 간호사들에게 수액 교체방법 등을 설명 듣고, 연습한 뒤에서야 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간호사와 요양보호사 몇몇은 병원 밖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지난 4개월 동안 좋은 분들에게 케어받고 있었구나 싶은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엄마는 마지막일지 모를 이 외출이 반가우면서도 힘들었다. 병원관계자들에게 희미한 웃음으로 고마움을 표현하고 차에 탔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햇살 좋은 날, 엄마는 차 보조석에서 빨리 도착하기만을 바라며 돌처럼 웅크린 채 꼼짝 않고 있었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벚꽃 좀 보라며 종달새처럼 쉴 새 없이 지저귀었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엄마와 함께 나누고 싶었지만, 엄마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장어가 먹고 싶다는 엄마를 위해 근처 장어집으로 갔다. 장어를 잘게 잘라 엄마 앞에 놓았다. 엄마는 잘게 조사 놓은 장어를 뒤로하고 잘 구워진 커다란 장어를 한입에 넣고 우물우물 잇몸으로 씹으며 말했다.

“아이 맛나다.”

장어는 2박 3일 동안 엄마가 자발적으로 먹은 마지막 식사였다.


휠체어 바퀴를 닦아 실내에서 이동할 때 사용했다. 엄마는 의식이 오락가락했고,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가끔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표현할 뿐이었다. 식사 시간과 화장실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엄마는 본인이 키운 손주들과 익숙한 우리 집에서 오빠까지 모두 모여 밥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가족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엄마는 화석처럼 앉아 고개를 주억거릴 뿐 좋아했던 음식들은 전혀 먹지 못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호박죽이라도 몇 숟가락 떠서 입에 넣어주었으나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식사 후 엄마의 퉁퉁 부은 다리를 딸과 함께 로션을 발라가며 마사지를 했다. 엄마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마친 오빠가 돌아갈 때 엄마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가니?”

엄마의 의식은 저 멀리, 몇십 년 전으로 돌아가 있는 것 같았다. 상황 설명 후 엄마를 다독인 후 오빠와 작별 인사를 했다. 오빠는 그저 말로만 인사를 했다. 마지막일지 모를 인사를. 내가 억지로 엄마의 손을 잡게 했고, 엄마는 그런 오빠를 쓰다듬었다. 그들은 그렇게 이별했다.


나는 엄마 옆에 누워서 잤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새벽 2시의 화장실 수발은 쉽지 않았다. 돌처럼 굳어버린 엄마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침대에서 휠체어로 이동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휠체어에서 변기로 엄마를 들어 올려 이동하는 것 또한 혼자 하기는 벅찼다. 화장실을 한번 다녀오면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성인용 기저귀를 채우는 게 옳았는데,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휠체어에서 변기로 이동하다가 엄마가 주저앉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엄마, 막내딸 힘들어. 도와줘. 변기에 앉자.”

엄마는 ‘으으응’하며 들릴 듯 말듯한 소리를 내며, 온몸에 힘을 주려 애썼다. 애쓰는 게 느껴졌지만, 화석이 되어버린 엄마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엄마를 들어 올려 변기에 앉히고 나는 땀을 닦았다. 그렇게 화장실을 3번 다녀오니 새로운 날이 밝았다.


이튿날, 손주들의 등교 인사를 받고 엄마는 다시 잠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침대에서 쿰쿰한 냄새가 났다. 살펴보니 엄마의 장루가 새고 있었다. 장폐색이 와서 응급 수술을 통해 소장을 배로 꺼내 인공 항문을 만들었다. 장루 주머니로 대변을 받고, 일정시간에 그것을 비우고, 닦는 일들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그것이었다. 투병 9개월간 해온 일이었다. 그런데 장루에서 내용물이 샌 것이다. 대변 냄새가 방안에 진동했고, 침대 시트와 이불, 옷이 오염됐다. 일이 세배로 커졌다.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하며 장루를 제거하고 새것을 부착했다. 그 과정에서 낯선 것이 눈에 띄었다. 소장 옆으로 딱딱하고 검은 작은 무엇인가가 나와 있었다. 간호사가 장루 갈 때 놀라지 말라고 했던 것이 이거구나 싶었다. 엄마의 암조직이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너무 놀랍고 가슴이 아팠다.


엄마의 배는 복수가 가득 차서 하품하는 개구리처럼 볼록 튀어나와 있었고, 벽처럼 단단했다. 배가 너무 단단해서 장루가 잘 붙지 않아서 샜던 것이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엄마의 몸을 씻기고 이불을 정리했다. 체력이 급격하게 소진되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모두 모인 저녁이 되어서야 모두 모였다. 엄마는 전날보다 더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를 않았다. 둘째 날의 새벽 화장실은 내 몸도 엄마처럼 천근만근이었다. 자꾸만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엄마에게 나는 투정을 부리고 말았다.

“지금 꼭 가야 해? 엄마 나 너무 힘들어.”

“미안해”


마지막 날, 아이들은 평상시처럼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각자의 학교로 출발했다. 호스피스병원으로 복귀하는 날이라 나는 바쁘게 짐을 정리하고 있었고, 엄마는 잠에 취해있었다. 준비를 마치고 이동하기 위해 엄마를 깨웠다.

“어어~어디가? 나도 데려가.”

“엄마, 왜 그래? 꿈꿨어? 누가 나왔는데?”

“....”

“아빠야?”

“아니”

“할머니야?”

“으응”

“외할머니가 엄마 보러 왔었구나.”

75세 엄마는 아기처럼 내 품에 안겨 이렇게 말했다.

“보고 싶어, 엄마, 나도 같이 가.”

“엄마, 우리 병원 가야 돼. 힘내자.”

“으응, 그래”

할머니가 엄마를 마중 나온 것 같았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듯해서 무서웠다.

‘할머니, 조금만 더 있다가 오세요. 지금은 안 돼요.’


병원 가는 길은 험난했다. 엄마의 몸은 웅크릴 힘조차 없는지 휴지조각처럼 널브러져 있었고,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뒷좌석에서 엄마의 얼굴에 비닐봉지를 댄 채 병원까지 이동했다. 병원관계자가 밖으로 나와 엄마의 이송을 도왔다. 응급상황이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줄지어 병실로 들어갔고, 우리는 쫓겨나듯 그곳을 나와야 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희가 돌보겠습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엄마와의 작별 인사는 꿈 이야기가 전부였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2박 3일간의 긴장이 풀려 낮부터 계속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3시 20분. 엄마는 하늘의 별이 되었다.


엄마는 이 특별한 외출을 위해 사력을 다해 버티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손주와 자식들을 익숙한 공간에서 다시 보고 싶어 견뎌 냈다. 사랑하는 딸의 집에서 죽으면, 그 딸이 힘들까 봐 병원에 와서야 마지막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가 옛날 거여동집 침대방에서 작고한 후 엄마는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엄마는 막내딸을 위해 사력을 다해 버틴 것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딸을 배려하려고 했던 엄마의 그 마음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너무나 엄마다운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고마워 엄마.

이번에는 아빠가 마중 나왔을까?

엄마,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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