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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가는 길

by 윤슬

‘드르르르륵’

2024년 4월 12일 새벽 3:10, 친정 엄마가 입원해 있는 호스피스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나는 평상시처럼 보청기를 빼고 잤다. 보청기의 마이크가 좌우로 눌리며 삐~소리가 나고 이물감 때문에 귀가 아프기 때문이다. 이경화증으로 난청이 생겨 1월부터 양측 보청기를 착용해야 했다. 스트레스 때문일까, 나에게 왜 이런 병이 생겼을까 고민했지만, 난청 따위는 말기암과 비교할 거리가 아니었다. 내 청력은 45dB, 전화기 진동음은 대략 39 데시벨, 내가 들을 수 없는 진동 소리였다. 남편이 세컨드 하우스에서 집으로 와서 나를 깨웠다. 큰아이 전학 때문에 우리는 한시적으로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었다. 남편을 따라 집을 나섰다. 불안했다.


“병원에서 뭐래?”

“장모님 안 좋으시대. 최대한 빨리 오래.”

“응, 알았어.”

“처형은 병원이랑 바로 통화가 되어서, 엄마 귀에 10여 분간 이야기를 했대.”

“그게 무슨 소리야. 벌써 돌아가신 거야?”

“나도 모르겠어. 일단 빨리 가자.”


30분 거리의 병원으로 부랴부랴 달려갔지만, 늦었다. 엄마는 이미 소천한 후였다. 엄마는 새벽 3시 20분에 별세했고, 언니는 3시 30분에, 나는 3시 40분에 도착했다. 내가 전화를 빨리 받았다면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엄마의 몸은 아직 따뜻했다. 그리고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엄마는 환자복에서 깨끗한 수의로 환복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치아가 없는 엄마의 입술이 자꾸만 입안으로 말려들어가 꺼내는데 힘들었다고 간호사가 말했다. 이놈의 치아는 엄마를 끝까지 괴롭히는구나 싶었다. 복수가 가득 찼던 배는 홀쭉해져 있었고, 허벅지부터 발등까지 퉁퉁 부었던 다리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엄마가 죽으면서 세균도 함께 죽은 것이다.

아직 따뜻한 엄마의 손과 다리, 얼굴, 그리고 굳게 닫힌 눈을 만졌다. 고장 난 수도꼭지 마냥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마냥 울 수만은 없었다. 온기가 남아 있는 엄마를 만질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그 시간이 소중했다. 눈과 손끝으로 엄마를 기억하기 위해 끊임없이 엄마를 만지고 또 만지고 보았다. 호스피스 병원의 새벽은 고요했고, 엄마는 그렇게 조용히 세상과 이별했다. 난청이 생기고 가장 후회되고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엄마의 이름이 적힌 사망진단서는 무거웠다. 무거워서 나는 도저히 들 수가 없었다. 엄마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증명서는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를 다시 만난 곳은 시체보관실이었다. 그곳은 적막하고 추웠다. 서류와 장례식장의 확인 절차들이 자꾸만 내게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라고 강요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엄마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환승하는 그 길을 많은 지인들이 함께 했다. 30여 개가 넘는 화환 속에서 국화꽃 향기가 진동했다. 꽃 속에 파묻혀, 그 향기를 입고 훌훌 떠나는 엄마의 발걸음이 느껴졌다. 엄마의 7남매가 전국에서 모여들었고, 장례식장은 장례식장다워졌다. 덕분에 나도 목 놓아 울 수 있었다. 이윽고, 회사 동료들과 대학원 동기, 친구들이 찾아와 위로해 주었다. 상주로서 해야 할 도리를 해야 했다. 이튿날, 전남 무안에서 시부모님이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왔다. 시부모님을 보는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

“우리 며느리 안쓰러워서 우짜노.”


엄마의 입관식은 오후 2시였다. 참석하기 싫었다. 엄마의 변한 모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호스피스 병원에서의 따뜻했던 그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가족들의 설득으로 용기 내어 입관식에 참여했다. 엄마는 네모 반듯한 상자에 누워있었고, 버선을 신은 발이 수의에 묶여 있었다. 그놈의 치아는 여기서도 말썽이었다. 엄마의 입이 자꾸만 벌어지는 것이다. 염을 하면서도 입이 벌어졌다. 엄마의 목구멍 안은 하얀색 거즈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엄마가 답답해 보였다. 그 거즈를 당장 뽑아버리고 싶었다.

이틀 사이 엄마는 또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장례지도사가 마지막으로 엄마의 손을 잡으라고 했다. 그 손은 엊그제 내가 잡았던 그 손이 아니었다. 낯설었다. 내 엄마가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장례식장 구석진 곳에서 건강했던 엄마의 사진을 보며 울었다. 남편은 장모님이 좋아하는 꽃 속에서 염을 잘 마쳤노라고 말했다.


나는 엄마의 관이 담긴 리무진을 탈 수가 없었다. 그냥 싫었다. 그래서 남편 차에 몸을 싣고 화장장으로 갔다. 두꺼운 문이 열리고, 그곳으로 엄마의 관이 빨려 들어갔다. 이윽고 불길이 솟아올랐다. 그 불은 여태 내가 보았던 불이 아니었다. 그 불을 멍하니 바라보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2시간의 기다림 끝에 엄마는 백골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이내 분쇄가 되어 유골함에 담겨 나에게로 왔다. 이 따스함은 엄마의 온기가 아니었다. 내 엄마를 집어삼킨 그 불의 온기였음을 나는 알고 있다.

아빠가 먼저 와서 자리 잡아 놓은 그곳, 공동묘지 한편 양지바른 곳에 엄마를 두고, 우리는 떠났다. 아빠가 있기에 엄마는 외롭지 않을 거라 위로하며, 나 자신을 다독였다.

엄마가 떠나고 1년이 지난 후, 아빠의 묘를 이장해 엄마와 합장을 했다. 이로서 엄마와 아빠는 45년 만에 가족묘 안에서 합방을 시작했다. 엄마에게 가는 길이 이제는 슬프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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