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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다시만난 아빠

by 윤슬


“묘지 사용 기한은 최장 사십오 년입니다.”

공원묘지 관리소에서 연락이 왔다.


올해 내 나이 사십칠. 아빠가 두 살에 죽었으니, 묘지는 올해가 마지막 해이다. 아빠는 경기도 광주의 전망 좋은 산꼭대기에서 사십오 년간 있었다.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는 내가 균형을 못 잡아 뒤로 잘 넘어지니까 다칠까 봐 모자에 솜을 넣어 주는 자상한 아빠였다. 그런 자상한 아빠가 우리 곁을 일찍 떠나버린 게, 원망스럽고 아쉽고 허전했다.


어렸을 때는 엄마 등에 업혀서 산소에 갔고, 걷는 게 수월해질 만큼 컸을 때는 작은 아빠들 손을 잡고 매해 3번씩 성지 순례하듯 산소에 갔다. 어른들은 제사 음식을 머리에 이고 지고 버스를 탔고, 묘지 입구부터 30여 분 거리의 산꼭대기를 매해 올라갔다. 아빠에 대한 기억이 없는 나는, 맛있는 제사 음식을 먹고, 자동차 타고 타고 여행 가는 기분이 들어 산소에 가는 게 좋았다. 그런데 산속을 올라갈 때의 적막은 싫었다. 산소에서는 왜 경건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산소에서 엄마는 늘 말이 없었고, 음복도 하지 않았다. 봉분의 잡초를 뽑고, 발로 밟을 뿐이었다. 내가 봉분에 올라가면 혼나는데 엄마가 밟으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절을 하는데, 엄마는 멍하게 앉아서 산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고, 친할머니는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잔소리 많던 친할머니도 산소에서만큼은 엄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슬픈 표정의 엄마가 이상해 보였다. 내가 엄마에게 달려갈라치면, 작은 아빠들이 내 손을 잡고 빙그르르 돌려주며 놀아주었고, 엄마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어른들이 제사 준비로 바쁠 때, 나는 오빠와 메뚜기를 잡으러 다녔다. 의욕에 앞서 봉분 위에 있는 메뚜기를 잡겠다고 기어갈라치면 작은 아빠의 불호령에 깜짝 놀라 내려오곤 했었다.

오빠는 방아깨비를 잡아, 뒷다리를 꽉 잡고 내 앞에 내밀었다. 늘씬한 몸매에 긴 다리와 더듬이를 가진 방아깨비가 오빠의 손 안에서 방아 찧는 그 모습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나는 한참을 방아깨비와 놀았다. 오빠는 산소에 갈 때마다 매번 내게 방아깨비를 선물했다. 산소는 내가 의미를 알고 규정하기 전에 친숙해져 버린 그런 곳이었다.


비석에는 엄마이름이 없었다. 오빠, 언니, 내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을 뿐이었다. 초등학생이 된 후 돌에 이름이 새겨진 것이 신기해서 갈 때마다 내 이름이 잘 있나 확인하곤 했었다. 메뚜기를 잡으러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비석도 열심히 읽었다. 다른 사람들 비석은 글씨가 빼곡했는데, 아빠의 비석은 허전하고 쓸쓸했다. 어느 날 작은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돌에는 왜 우리 이름만 있어요?”

작은 아빠는 대답 대신 나를 꼭 안아주었다.


결혼 한 후에는 오롯이 우리 가족들끼리 산소에 갔다. 삼십 년 넘게 방문하는 산소는 이제 가벼운 등산과 가족 야유회 장소가 되었다. 간단히 절을 한 후, 돗자리와 캠핑 테이블을 펴서 준비한 음식을 온 가족이 둘러앉아 음복을 했다. 중학생인 조카가 두 살, 다섯 살인 내 아이들을 발 비행기 태워주며 놀았고, 메뚜기를 잡으러 푸른 잔디밭 곳곳을 뛰어다녔다.


예전의 오빠와 나처럼.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솜사탕처럼 떠다니고, 나무와 잔디가 푸릇푸릇한 그곳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까르륵까르륵’ 울려 퍼졌다. 이따금 까마귀가 ‘까아악 까아악’ 하고, 여기가 공원이 아닌 산소임을 알려왔다. 공동묘지는 슬프고 우울한 장소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친근하고 따뜻한 곳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개장하는 날은 날씨가 무척 좋았다. 땀을 송글 송글 흘리는 인부들 머리 위로 청명한 하늘에 뭉게구름이 그림 같이 아름다웠다. 인부들은 비석을 먼저 쓰러트렸다. 사십오 년간 굳건히 자리를 지킨 비석이 단 1분 만에 바닥으로 쓰러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성묘 후 집으로 돌아갈 때면, 나는 늘 뒤돌아서 그 쓸쓸한 비석을 바라보았었다. 내 이름이 적힌 그 비석이 장승같이 아빠 산소를 지키고 있는 게 왠지 모르게 든든했었기 때문이다. 몇 번의 흔들림으로 바닥에 누워버린 그 비석이, 젊은 날 허무하게 죽은 아빠 같아 가슴이 아팠다.


봉긋했던 봉분 대신 깊은 구덩이가 파였고, 그 아래 아빠가 있었다. 사진 속 그 아빠는 온데간데없었고, 누런 유골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낯설고 무서웠다. 이 과정이 어서 빨리 끝났으면 싶었다. 유골을 하얀 상자에 옮겨 담고 화장장으로 갔다. 엄마를 화장할 때는 2시간여 걸렸지만, 아빠는 30여 분 만에 끝이 났다. 아빠는 긴 기다림이 지겨워 어서 빨리 엄마 곁으로 가고 싶었나 보다. 커다란 소나무 가지에 학 두 마리가 한가로이 쉬고 있고, 두 마리는 유유자적 하늘을 날고 있는 회색 빛깔의 유골함에 아빠가 담겼다. 나는 아빠의 포근한 품이 그리웠는데, 수박 만한 무게의 아빠는 그저 차갑고, 묵직할 뿐이었다.


합장하는 날은 내 마음처럼 비가 왔다. 아빠는 사십오 년 만에 유골함에 담겨 봉안묘에서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따뜻한 주황색 잎사귀에 나비가 날아들고, 분홍색 꽃이 활짝 핀 유골함에서 아빠를 기다렸다. 천막 안에서 옹기종기 모여 45년 만에 만난 것을 기념하며 제사를 지냈다. 나는 엄마가 생전에 좋아했던 닭발과 마지막으로 드신 장어를 준비해서 제사상에 올렸다. 우리 가족에게는 의미 있는 합장이었다. 엄마도 아빠도 이날을 얼마나 기다리고, 그리워했을까 싶었다.

합장을 앞두고 외삼촌이 엄마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나 젊은 남자랑 살고 있어"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의 해숙과 낙준처럼, 엄마는 75세의 모습으로, 아빠는 38세의 모습으로 두 영혼이 만난 걸까? 조카를 위로하고자 하는 외삼촌의 따뜻한 거짓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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