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평 자가의 전신갑주
‘아빠 힘내세요~우리가 있잖아요~’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 가지고 오셨어요 음음’
내가 제일 싫어하는 동요였다.
불러본 적 없는 호칭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이다. 나는 아빠가 없다. 내가 말을 시작하고 혼자 걷기 시작할 18개월 무렵 아빠는 서울에 집 다섯 채와 삼 남매, 그리고 32살의 젊은 아내를 남겨두고 심장마비로 죽었다. 1980년, 11월이었다.
“뭘 믿고 형수한테 그 집을 줘요? 우리 형이 모은 재산인데!”
“집 팔아먹고, 애들 버리고 도망가려고?”
“남편 잡아먹은 년”
삼촌들과 친할머니는 장례식 후 엄마에게 온갖 악다구니를 퍼부어댔다. 엄마 편은 아무도 없었다. 삼촌들은 우리가 사는 집조차도 빼앗기 위해 엄마를 내쫓고, 삼 남매를 삼촌들 세 명이서 하나씩 맡아 기르자는 계획도 세웠었다. 과부가 된 젊은 엄마는 그들에게 자신을 증명해 내며 맞서 싸웠고 우리 삼 남매와 집 한 채를 겨우 지켜 냈다. 게다가 아빠가 없는 그 집에서 매년 제사와 명절 음식을 하며 맏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했다. 사별에 대한 위로는커녕, 비난과 수모, 모멸이 낭자했던 바로 그 집에서 말이다. 나는 엄마가 어떤 심정으로 그 모진 상황을 버텼고, 매년 그들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다정하고 살갑던 삼촌들이 돈 앞에서 변해버린 모습과 엄마가 당한 굴욕, 이 모든 것을 지켜본 초등 4학년의 언니는, 삼촌들을 증오했고, 엄마의 대처에 대해 답답해했었다.
아빠는 월남전 참전 후 모은 종잣돈으로 운수업을 했고, 돈이 생기는 대로 서울에 집을 샀다. 아빠의 재산을 삼 남매 양육에 사용할 수 있었다면, 엄마는 어린 나를 떼어 놓고 공장에 가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르겠다. 엄마는 매일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일을 하러 나갔고, 언니와 오빠도 차례대로 학교에 갔다. 잠에서 깨면서부터 나는 혼자였다. 커다란 방에 가지런히 개켜진 이불들과 식은 밥상만이 나와 같은 공간에 있을 뿐이었다.
우리 집은 2층의 유럽식 복층 집이었다. 2미터는 될 듯한 커다란 대문이 있었고, 작은 정원에는 푸른 잔디밭 위에 넓적한 돌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었다. 정원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수국과 장미, 그리고 포도나무가 있었다. 포도나무 넝쿨을 지탱하는 나무 지지대가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더운 여름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시원했다. 머리 위의 덜 익은 작은 포도송이를 따서 오물오물 씹다가 시큼해서 다시 뱉어냈던 기억이 난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집이 내게는 쓸쓸했다.
아빠 사후, 잔디밭은 시멘트로 덮였고, 포도나무 넝쿨은 관리가 안 돼 어두컴컴한 동굴로 변했고, 색색의 수국은 시들어 갔다. 생명력 강한 장미만이 담장 밖으로 가시 돋친 줄기를 뻗치고 있었다. 성인 키보다 큰 거실 창문은 도둑이 들어올 것만 같아 무서웠고, 거실에서 방으로 가는 계단에 있는 짙은 유화의 커다란 폭포 그림은 을씨년스러웠다. 거실의 강화 마루는 차가웠고,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샹들리에는 오페라의 유령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집에 나는 늘 혼자였다. 해가 져서야, 오빠, 언니, 엄마가 차례대로 들어왔다.
집을 둘러싼 삼촌과 엄마의 다툼을 지켜본 9살 위의 언니는 이 전쟁 같은 상황에서 동생들을 지키는 전사가 되어야 했다. 매일 같이 우리의 정신을 중무장을 시켰다.
“너희들 아빠 없는 티 내지 마!”
언니는 친절하지 않았다. 미취학인 내게 부연 설명 따위는 없었다. 나는 ‘아빠 없는 티’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흐르는 콧물을 옷소매로 닦거나, 오빠와 싸울 때, 방 청소를 하지 않았을 때, ‘아빠 없는 티 내지 마’라는 말과 함께 언니에게 혼이 났었다. ‘아빠 없는 티’는 ‘더럽고, 지저분하고, 욕하는 거’ 구나 생각했다. 그 후 나는 열심히 휴지로 코를 풀고, 방을 청소하고, 욕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었다.
나는 8살이 되어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서는 매 학기 초에 가정환경 조사를 했다. 선생님은 반 학생들 모두가 있는 교실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아빠 없는 사람? 손들어요!”
“야! 쟤 아빠 없대. 불쌍해.”
꽁꽁 숨겨 온 내 비밀이 친구들 앞에서 까발려지는 순간이었다. 공개적으로 ‘아빠 없는 티’를 내야 하는 학기 초는 죽을 만큼 창피했고 싫었었다. 낙인이 찍히는 순간이었다. 80년대는 아빠나 엄마가 없는 가정을 ‘결손가정’이라 했고, 불우한 이웃에 속했다. 선생님은 방과 후 추가적인 조사를 했다. 방이 몇 개나, 전화기는 있냐, 집은 전세냐 월세냐 자가냐, 일은 누가 하시냐, 얼마를 버시냐 등이었다. 나는 어깨를 쫙 펴고, 눈에 힘을 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우리 집은 2층 집 50평 자가예요. 아빠가 지어주셨어요.”
누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쳐준 적은 없었다. 나에게 집은 주변의 불쌍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전신 갑주였고, 나는 그것을 생득적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국민학교 내내 가혹한 가정환경 조사를 받으면서 내 갑옷은 더욱 단단해졌다.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나와 내 친구를 호출했다. 불우 가정 돕기의 일환으로 옷이 지급되는데, 누가 받겠느냐고 물었다. 친구와 나는 서로 뽀로통해 있었고, 둘 다 그 옷을 받기 싫어했다. 아빠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불우한 아이가 되는 것이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2층 집 자가를 등에 업고 그 옷을 친구에게 넘겨버렸다. 친구는 어이없어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판세를 뒤집을 카드가 그 친구에게는 없었다. 그 친구는 엄마와 둘이 살았고, 작은 연립주택에 살고 있었다. 그 친구는 바가지 머리에 보이시한 옷을 주로 입고 다녔었다.
“야! 내가 왜 그 옷을 입어야 하는데? 네가 그 옷 입어. 난 싫어”
“나는 집이 있어. 그러니까 그 옷은 네 거야!”
“아, 짜증 나! 너 재수 없어!”
우리는 치졸하게 싸웠다. 친구들 앞에서 창피당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어느 월요일, 그 친구가 평소와 다르게 하얀색 스타킹에 반짝이는 검정 벨벳 원피스를 입고 등교를 했다. 수더분하게 입고 다니던 아이가 원피스를 입고 오니 친구들의 관심이 쏠렸다. 손으로 만지면 반짝이가 묻어났고, 쓰다듬는 손의 방향에 따라 벨벳의 결이 바뀌는 예쁘고 고급스러운 옷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들은 그 친구의 옷을 부러워하며, 연신 손으로 만져댔다. 나는 그 옷이 불우이웃 돕기용 옷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전교생 조회 시간에 그 친구 이름이 호명되었다. 친구는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조회대로 올라가 그 옷을 입은 채 귀빈들과 사진을 찍었다. 친구는 씁쓸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고, 나는 그 시선을 외면했다. 그 후 ‘아빠 없는 티’는 ‘불쌍하고, 가난한 것’이 추가되었다.
그 옷을 입고 등교해야만 했던 친구, 그 옷을 입기 싫어하는 아이를 설득해서 입혀야만 했던 친구의 엄마 마음이 어떠했을까. 예쁘지만, 예쁘지 않은 그 옷은, 누구를 위한 옷이었던가?
1997년 IMF, 나는 고3이었고, 엄마도 실직했다. 대학 입학 원서비를 내야 했다. 담임은 안전하게 3군데 원서를 쓰자고 했다. 각각 3만 원씩, 9만 원이 필요했다. 그런데 엄마는 6만 원만 주었다. 일단은 상향 지원과 내 수준의 대학 입학원서를 샀다. 하향 지원도 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다. 우울하고 불안해서 눈물이 났다. 내 인생이 이 3만 원으로 결정 날 수도 있다는 것이 슬펐다. 울고 있는 내게 6살 위의 오빠가 말했다.
“왜 울어?”
“대학 원서비 내야 하는데 3만 원이 부족해.”
“내가 줄게. 이걸로 원서 사”
평상시 나를 때리고 못 살게만 굴던 오빠가 그날은 천사 같았다. 오빠가 준 3만 원 덕분에 난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그 무엇보다 귀하고 값진 돈이었다. 대학 입학 후 엄마는 다행히도 등록금을 지원해 주었지만, 교재비와 용돈, 식비는 내가 벌어서 생활해야 했다. 대학 시절 나의 유일한 사치는 학회 동아리였다. 전공 공부를 폭넓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엄마에게 덜 미안했기 때문이다. 3학년 때 나는 학회 회장이 되었고, 세미나와 각종 행사를 진행했다. 그중 선배의 결혼식 축가 연습은 신나는 행사였다. 결혼식에는 맛있는 뷔페가 있어 배불리 밥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선배의 결혼식 당일,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결혼식에 가면, 아르바이트비를 받을 때까지 학교에 갈 교통비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나는 결국 선배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아빠 없는 티’를 내느니 욕먹기를 선택한 것이다.
“학회장이 안 오는 게 어디 있냐?”
“야, 너만 바쁘냐?”
“배신자!”
“언니/누나, 너무해요. 우리끼리 축가를 부르라고요?”
하루 종일 뷔페 음식이 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나는 그날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수제비를 먹었다.
아빠가 지은 그 집은 내가 고등학생 때 허문 후 다시 지었고, 대학교 2학년 때까지 그 터에서 살았다. 아빠가 지은 그 집이 허물어질 때 세상을 일찍 떠난 아빠에 대한 원망이 사라졌고, 그 터를 완전히 떠날 때 아빠에 대한 내 그리움도 희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