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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러우면 지는 거다.(feat. 오마이뉴스)

외며느리, 시누이 셋, 통 큰 선물

by 윤슬

나는 17년 차 서울깍쟁이 외며느리다. 남편은 전남 무안의 황태자로 자랐고, 3명의 시누이가 있다. 신혼 초 시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난감했다.


“엄마 시부모님과 어떻게 친해지지?”

“한 달 동안 매일 아침 전화해 봐.”


너무 옛날 방식 같았지만, 내가 친정엄마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엄마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말하는 것도 처음이라, 엄마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신혼여행 후부터 시댁에 아침 문안 전화를 했다.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침 전화가 힘들지는 않았었다. 다만,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어떤 주제로 말을 해야 하는지 어려웠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말했다.

“며느리 전화 기다리느라, 소가 밥을 늦게 먹는다”

매일 아침 시어버지는 소 밥을 주러 축사에 간다. 내 전화를 받고 나가다 보니 이런 불상사가 생기고 말았다. 그 후 소들을 위해 알람을 맞춰 놓고 정해진 시간에 전화를 했다. 1주일쯤 지나고시아버지가 말했다.

“아가~아침 전화 그만해도 된다. 고맙다.”


그만하고 싶은 유혹이 컸지만, 엄마의 조언대로 한 달을 꽉 채웠다. 미션을 완수한 후 시부모님이 아침마다 전화해 주어서 고마웠다고 말을 했다. 시댁이 멀리 있어서 자주 찾아뵙지 못한다. 아침 문안 전화 후로는 주말에 남편과 주 1회 안부 전화를 했다. 평일 아침 출근길에 전화를 하기도 했다. 따뜻하고 순박한 시부모님과 통화를 하면 마음이 푸근해져 눈물이 나기도 했었다. 그런 나를 남편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기도 했다.

“오늘도 수고해라, 고생한다”

외롭게 자란 내게, 그분들의 일상적인 말 한마디가 따뜻한 위로로 다가왔다. 그 말이 듣고 싶어 자꾸 전화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시부모님은 쌀, 고구마, 양파, 마늘, 고추 등의 농작물을 농사짓는다. 처음 인사를 간 날, 내가 말했다.

“어머니, 농사 많이 힘드시죠?”

“아냐, 너희 직장 다니듯 논, 밭이 내 직장이야, 난 농부고!”

전문직 농부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고, 커리어 우먼처럼 멋있었다.

결혼 5개월 차에 친정 엄마의 조언에 따라, 모내기를 하러 4시간 30분 동안 버스를 타고 혼자 시댁으로 갔다. 남편은 회사가 바쁜 시즌이라 휴가를 내지 못했다. 남편은 혼자 뭐 하러 가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난 가야 했다. 시부모님이 땀 흘려 농사지은 농작물을 가만히 앉아서 얻어먹을 수는 없었다. 시댁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의 일복인 몸빼 바지와 셔츠로 갈아입고, 일을 했다. 모판에 물을 주고, 옮기고, 하루 종일 같은 일을 무한 반복했다. 어머니는 며느리라고 봐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재밌었는데, 점차 허리와 어깨가 아팠고, 힘들었다. 요령을 피우며 쉬고 싶었지만, 환갑이 넘은 시부모님이 쉬지 않고 일을 해서 나는 감히 쉴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버스로 서울로 올라왔고, 나는 당연히 몸살이 났다. 그런 나를 남편은 어이없어하면서도, 고마워했다. 네 명의 친자식도 안 내려오는데, 며느리가 혼자 모내기하러 온 것이 기특했는지, 시부모님이 동네방네 자랑을 했다고 말했다. 힘들었지만, 새로운 경험이었고 뿌듯했다. 역시 친정 엄마의 말은 불변의 진리이다.

시시때때로 시댁에서 보내준 농작물은 식비 절감에 큰 도움이 되었다. 택배가 도착하면 부리나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전화를 했다. 모판 나르기를 한 후 농사일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힘든지 몸소 체험한 터라 감사의 마음이 더 컸다. 시부모님은 자식들에게 보내는 것을 좋아했고, 감사 인사를 받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늘 공짜로 받기만 하는 것이 죄송스러워 주전부리로 드실 간식을 보내 곤 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부모 자식 사이라 할지라도 어느 한쪽이 너무 받기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어머니와 식료품을 사러 무안 시장에 갔다. 시어머니의 팔짱을 끼고 수다를 떨며 걸어가는데, 상인들이 물었다

“딸이에요?”

“네, 딸이에요”

“닮았네, 보기 좋아요!”

우리는 서로 눈 맞춤을 하고 여고생처럼 까르륵 웃었다. 우리 시어머니는 특별하다. 각자의 삶을 존중하는 세련된 시어머니이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직접 전화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많지 않았다. 궁금증이 있거나,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으면 남편을 통해서 하고, 내가 간식 혹은 용돈을 보내는 특별 경우에는 직접 전화로 고마움을 표한다. 그리고 육아를 친정 엄마가 도와주는 것에 대해 항상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며 매년 풍성한 농작물로 보답을 한다. 내가 직장 일로 힘이 들어 퇴사 후 쉴 때, 이사를 했을 때 남편 몰래 나에게 두둑한 금일봉을 건네며 말했다.

“너 하고 싶은 거 해라. 수고했다.”

내가 어찌 이런 시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축사를 구경할 겸 시아버지를 따라갔다.

“아버님 저는 뭐 할까요?”

“소들이 낯선 사람을 보면 놀라니까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어라”

소들이 밥 먹는 걸 구경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아버님과 어색하게 팔짱을 끼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데이트를 했다. 아버지가 없는 내게, 시아버지는 어려우면서도 포근하고 든든한 존재였다. 출산하기 전까지는 시부모님과 소소한 1:1 데이트를 했었다. 한 달 동안의 전화 통화와 이런 시간이 시부모님과의 관계 형성에 밑거름이 된듯하다.


명절이 되면, 나는 단체급식소의 조리사가 되었다. 급식 표를 만들고, 삼시 세끼 음식을 만들었다. 요리 초보인 내게 단체 급식은 공포였다. ISTJ 성격상 급식 표와 레시피를 준비하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까지 마쳐야 마음이 편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매 끼니 전투하듯 13인분 요리를 했다. 다행히도 질 좋은 재료와 레시피 덕분에 평균 이상의 맛을 구현할 수 있었다. 간혹 맛이 없더라도 내 정성을 생각하며 감사히 맛있게 먹었다. 그 덕에 요리실력도 조금 향상되었다.


며느리 13년 차 어느 가을, 시아버지가 내게 직접 전화를 했다. 드문 일이었다.

“선물이 곧 도착할 테니 놀라지 말고 받아라”

다음 날 도착한 것은 날렵하게 잘 빠진 새하얀 최신형 자동차였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그때, 도시락을 갖고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는 며느리가 안쓰러워 시부모님이 깜짝 선물을 한 것이다. 내 생애 가장 크고, 감동적인 선물이었다.

‘이 차를 받아도 되나?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될까?’

얼떨떨했다. 남편 품에 안겨 나는 한없이 울었다. 나는 처음으로 시아버지의 사랑을 느꼈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금도 차를 탈 때면, 시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라 뭉클하다. 두 분이 며느리를 위해 소곤소곤 비밀 대화를 나누며 고민했을 것을 상상하면 너무 감사하다.


2025년 4월 12일, 나의 태양, 친정엄마가 하늘의 별이 되었다. 그리고 3주 후 시아버지의 팔순 잔치가 있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시아버지의 팔순 잔치. 그날은 내 생일이기도 했다. 나는 엄마의 49재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버티듯 살아가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과 가장 기쁜 일이 겹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출근하듯, 습관적으로 옷을 입고 행사장으로 갔다. 다행히도 시아버지의 선물은 미리 준비해 놓아 부담이 없었다. 멋쟁이 시아버지에게 직장 다니는 며느리 찬스로 명품 옷을 선물하고 스타일링을 해드렸다. 지인들이 명품을 알아보고 한 마디씩 했다.

“아따, 옷 멋지네~누가 사줬단가?”

“우리 메누리가 사줬지”

하며 아버님은 호탕하게 웃었다.


마음은 슬픈데 웃어야 하는 상황이 힘들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억지로라도 웃고, 먹고, 이야기하다 보니, 우울하고 슬픈 기분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서 빨리 잔치가 끝나고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잔치가 끝나고 집에 가려는 찰나, 둘째 시누이가 본인 집에서 시아버지의 2차 파티가 있을 예정이니 5분만 앉았다가 가라고 간곡히 붙잡았다. 나는 기운이 없어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시누이 셋이 2차 파티를 준비하며 분주했다. 곧이어 하얀색 진주 모양의 초콜릿이 듬뿍 올라간 우아한 케이크가 내 앞으로 왔다.


“우리 며느리, 생일 축하한다. 고생했다”

내 생일 축하 모임이라고 하면 내가 사양하고 집에 갈까 봐, 시아버지 2차 파티로 핑계를 댔던 것이다. 시누이 셋이 준비한 깜짝 파티였다. 아버님은 두툼한 봉투를 건네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케이크에 있는 며느리 공로상을 시아버님이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이윽고 시어머니가 꽃다발을 주며 말했다.

“너는 이제 며느리 아니고 우리 집 넷째 딸이다’”

나를 위한 시누이들의 생일 파티 이벤트였다. 나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시아버지 팔순 준비하느라 바쁜데, 내 깜짝 파티까지 준비한 시누이들의 마음이 고마웠고, 다시 엄마가 생긴 것 같아 좋았고, 시아버지의 품이 포근했다.

친정엄마가 소천한 지 1년이 지나고,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내게 부모 부모는 시부모님이 전부였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주말에 짧게라도 찾아뵙기로 했다. 남편과 데이트하듯 시골에 가서 시부모님과 맛있는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날 아침, 밥을 먹고 서울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아버님이 보이지 않았다.

“유진 애미야~잠깐 나와봐라. 네가 직접 봐야 할 것 같다.”

시어머니가 말했다. 나는 부랴부랴 대문으로 나갔다. 여든이 훌쩍 넘은 시아버지는 구부정한 자세로, 한 손에는 걸레를, 한 손에는 고무 호수를 들고 물을 뿌리고, 문지르며, 내 차를 세차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다정했다. 나는 멀찍이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서서 울었다. 눈물이 나도 모르게 줄줄 흘렀다.

“아버님,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해요. 다음에는 세차해서 올게요.”

“별것 아니다. 내가 해주고 싶었다. 차는 깨끗해야제~”

세차가 끝난 후 나는 시아버님을 안고 한참을 울었다. 진짜 아버지 같았다. 따스함이 느껴졌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 느낌, 아버지의 사랑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며느리로 갓생 살기는 혼자 할 수 없다. 며느리와 시댁의 궁합이 맞아야 가능하다. 나는 우리 시부모님과 찰떡궁합인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시댁과 나의 관계를 신기해한다. 나는 오늘도 며느리로, 넷째 딸로 갓생 살기 중이다. 부러운가? 부러우면 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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