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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를 안 낳았으면 어찌했을고!

엄마의 소원

by 윤슬


나는 늦둥이로 태어났다. 위로 10살, 6살 터울의 언니, 오빠가 있다. 47년 전, 엄마와 아빠는 셋째를 원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난 것은 친할머니의 강권 덕분이었다. 부모가 원하지 않는 아이, 나는 그렇게 얻어걸린 인생이었다.


내가 18개월이 되었을 때 아빠는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아장아장 걷고, 말을 시작하는 셋째를 뒤로하고, 엄마는 전쟁 같은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애 셋 젊은 과부로서의 삶은 어떠했을까? 내가 없었다면, 엄마는 재혼했을까? 나는 엄마의 앞길을 막은 것 같아 늘 미안했고, 버려질까 두려웠다. 이때부터 엄마에 대한 부채감이 생긴 것 같다.


엄마는 집안일을 할 때 종종 현철과 문주란의 노래를 맛깔나게 부르고, 명절에 작은 아빠들과 내기 고스톱을 치는 젊고 흥이 많은 여자였다. 남편이 죽었어도 큰아들, 큰며느리로서의 책무인 명절과 제사를 주도적으로 수행하는 착하고 미련한 며느리였다. 칙칙한 구두공장에서 시커먼 장갑을 끼고 일을 해도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엄마는 미인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늘 재혼을 권유했고, 엄마는 그들을 외면하며 묵묵히 44년을 살아내었다. 서른 살, 애 셋, 젊은 과부의 버팀목은 무엇이었을까?

시어머니와 시동생들은 아빠가 죽자 엄마로부터 재산을 빼앗으려 혈안이 되었었다. 그들로부터 어린 자식들과 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이 엄마의 버팀목이었을까? 의무감과 책임감만으로 삶을 버텨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생 때 말하곤 했었다.

“너를 안 낳았으면 어찌했을고!”

그때는 그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존재 자체가 엄마를 힘들게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성인이 된 후, 엄마의 자질구레하지만, 어려운 일들을 처리해 주었을 때도 종종 같은 말을 하곤 했다. 나는 그저 일상적인 공치사라고 생각하고, 그 말을 흘려보냈었다. 자식으로서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년 전, 엄마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엄마의 투병 기간은 내가 부채감을 청산할 기회였다. 나는 회사에 가족 돌봄 휴가 3개월을 신청하고 엄마를 간호했다. 엄마는 병식을 수용하기도 전에 응급 장루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 후 전신마취에서 덜 깬 엄마는 아이러니하게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아파요, 아파요. 선생님 고마워요.”

나를 의사, 간호사랑 착각했는지, ‘선생님’으로 불렀고, 기운 없는 목소리에 애교가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연신 ‘아파요’를 외쳤다. 나는 그런 엄마의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영숙 씨, 잘 참았어요. 수술 잘 됐어요. 잘 버텨줘서 고마워요.”


수술과 항암치료의 지루한 병원 생활에서 엄마와 나는 매끼 식사 후 병실에서 재미를 찾아 나섰다. 건물 중간층에 넓은 정원이 있어 그곳으로 산책을 갔다. 엄마의 휠체어에는 수액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곳에는 병원 어린이집에서 심어 놓은 가지, 애호박, 방울토마토가 탐스럽게 열려 있었다. 엄마와 나는 무성한 잡초들 속에서 싱싱한 방울토마토 6개를 주워서 병실에서 씻어 먹었다. 아주 달콤한 주전부리였다.

우리는 끼니때마다 고스톱을 쳤다. 의사와 간호사가 우리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웃었다. 담당 종양내과 의사가 커튼을 쳐주며 말했다.

“재밌으세요? 보기 좋아요. 적당히 치셔야 해요. 아시죠?”

내기 고스톱 후 진 사람이 산 수박 주스를 빨대로 쪽쪽 빨아먹으며 엄마가 말했다.


“네가 있어서 행복하다”


이 말이 ‘너를 안 낳았으면 어찌했을고!’와 동급의 표현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엄마는 내가 있어서 좋았구나. 내가 짐이 아닌 삶의 위로이자 희망이었음을 알게 된 찰나에, 내 존재에 대한 인정이 나를 끌어안았다. 조금 더 일찍 깨닫지 못한 나의 무지함에 아쉬움이 남았다.

3개월의 휴직을 마치고 나는 직장으로 복귀를 했다. 일을 하며 사춘기 남매를 키우는 내가 엄마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내 첫째 아이가 학폭을 당해 교육청 심의를 준비하는 기간과 엄마의 투병 기간이 맞물려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내게 계속 말했다. 언니도 있었지만, 엄마는 막내인 내가 편했던 것이다.

‘바다가 보고 싶다’, ‘오빠에게 따뜻한 옷을 사서 입혀라’, ‘내 형제들 만나고 싶다’, ‘내 고향, 전라남도 해남에 가고 싶다’, ‘우리 집에서 애들이랑 밥 먹고 싶다’ 등등. 그중 고향 가기를 제외하고 모두 성취했다. 해남은 엄마가 가기에는 너무 먼 곳이었다.

손녀를 향한 할머니의 당부. "우리 같이 살자~버티자."

죽어가는 엄마와 죽고 싶어 하는 딸을 동시에 돌보는 일은 너무 벅차고 힘이 들었다. 내 딸과 엄마는 만날 때 마다 손을 맞잡고, 얼굴을 부비며 서로에게 말했다.


"살자, 우리 같이 살자."

"할머니, 저도 버틸께요. 할머니도 버티세요!"

학폭 심의가 끝난 후 큰아이 전학을 시키고, 엄마도 편안해졌을 무렵, 결혼기념일에 수고한 남편과 오랜만에 쉼을 가지려고 휴가를 냈었다. 그런데 엄마는 그날 나에게 ‘오빠에게 따뜻한 옷을 사 입혀라’는 미션을 주었다.


“엄마는 왜 나한테만 그래!”

나만 의지하는 엄마가 밉고 야속해서 울면서 소리쳤다. 엄마는 몸이 힘들어지는 만큼 마음이 촉박했고, 점점 강퍅해져 갔다. 나를 배려할 삶의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음을 안다. 알면서도 너무 힘들어서 엄마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인 오빠를 픽업해서 병원 진료를 마치고, 옷을 사서 입히고, 밥을 먹이고, 시설로 데려다주는 일정이었다. 나는 그날 운전만 4시간을 했다. 오빠에게 따뜻한 겨울 외투와 기모 바지, 장갑을 사서 갈아입히고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보여주었다. 엄마는 안심의 미소를 지으며, 짐심을 담아 꾹꾹 눌러쓴 봉투를 슬며시 내밀었다.

내 소중한 휴가는 그렇게 지나갔다. 결혼기념일 남편과의 식사는 결국 취소했다. 우리에게는 내년 결혼기념일이 있으므로. 남편에게 너무 미안했다.

엄마는 그다음 해 1월에 호스피스 병원으로 갔다. 엄마의 마지막 소원은 쉽지 않았다. 호스피스 병원에서 외출이란 하늘의 별 따기였기 때문이다. 수차례 의사를 설득하고,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간호사에게 링거 사용법을 설명받고, 실습하고서야 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벚꽃이 흩날리는 화창한 봄날, 엄마는 고개를 푹 숙이고 웅크린 채, 어서 빨리 도착하기만을 바랬다. 자신의 몸상태를 알기에, 사력을 다해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마지막 벚꽃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에 연신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벚꽃 좀 봐봐, 엄마!”


엄마는 집에 도착해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잤다. 오로지 식사 시간에만 깨어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본인은 먹지도 못하면서 아들이 맛있게 밥 먹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는 우리 집에서 2박 3일을 보내고 호스피스 병원으로 복귀한 후 17시간 만에 작고했다.

소리치며 응석 부릴 엄마가 없는 지금, 나는 알고 있다. 남편과 사별 후 44년의 삶을 버티게 해 준 원동력이 세 자녀였고, 늦둥이 막내딸을 통해 이승에서 하고 싶은 것을 대신 이루었다는 것을. 내가 힘든 상황인 줄 알면서도, 의지할 사람이 나밖에 없어 미안해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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