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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과 문 - 들뢰즈와 짐멜의 철학

대도무문(大道無門)

by 철학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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桃李不言 下自成蹊 (도리불언 하자성혜)

복숭아와 오얏은 말이 없지만, 그 밑으로는 길이 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적혀 있는 다음 구절. 유래가 되는 에피소드나, 구절이 담고 있는 상징은 차치하고서 그저 읽히는 대로의 뜻만을 음미해보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 밑으로는 길이 생겨난다. 열매를 따고자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무 아래를 오가기 때문이다. 나무 아래에 돋아나 있던 이름 모를 잡풀들이 수많은 발자국들에 눌려 사라지고, 이름 모를 잡풀들 사이로 길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사람의 발자국부터 길로 인식할 수 있을만한 형태였던 것일까? 적어도 열매가 발견된 초창기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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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홈이 패인 공간’이란 개념은, 건물들이 들어찬 공간에 골목길 혹은 양 둔덕 사이를 흐르는 물길을 생각하면 쉽다. 골목길과 물길은 언제부터 길이었을까? 건물이 들어서기 전과 물이 흐르기 전에는 그곳에 길이 없었던 것일까? 이전까지는 사람이 지나다니지 못했고, 물이 흐르지 못했을까? 오히려 건물이 들어서고 물길이 생겨나면서 사람과 물의 동선이 패인 ‘홈’으로 한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길은 인도(引導)의 기능을 지니지만, 유도(誘導)의 기능도 지니고 있다. 내가 가야할 방향을 지시하는 확연함이기도 하지만, 다른 길의 가능성에 대한 제고를 방해하는 고정관념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길이 지닌 폐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제국이나 중국왕조의 유적지를 둘러보다보면 마차의 폭을 통일하기 위해서 바닥에 파 놓은 두 줄기의 홈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마차들이 오고간 흔적들에 눌린 세월의 무게로 자연스럽게 길이 만들어지기 마련이지만, 나중에는 정책적으로 마차 바퀴를 유인하는 규격의 선로가 등장한다. 이후 마차는 선로를 벗어나지 않는 기차나 다름없었고, 그 ‘경로의존성’이 실제로 현대의 시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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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그 자체로 목적지로 향해 가기 위한 명료함이지만, 다른 경로의 가능성을 생각지 않게 하는 ‘은폐’이기도 하다. 일상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사례를 들자면, 늘 가던 길로만 다니는 습관 때문에 정류장과 지하철역까지의 최단거리가 종종 나중에 발견되는 경우일 것이다. 때론 갑작스레 길 앞에 가로놓이는 막막함이 의외의 가능성으로 숨어 있던 다른 길로 이끌기도 한다.


도구가 구비되어 있다면 가지를 치며 헤쳐 나가는 우거진 수풀이, 능력이 구비되어 있다면 다이렉트로 타고 오르는 암벽이 더 효율적인 길이 된다. 그러나 익히 알고 있는 길 앞에서는 여간해선 잠재적 길의 가능성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냥 기억의 지도를 따라가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상 지나다니는 길의 바로 몇 걸음 뒤에 더 편한 지름길이 있다는 사실이, 영원히 알려지지 않는 미래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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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열릴 수도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문을 닫고 있으면 문이 달리지 않은 벽의 내부에 있을 때보다 더 강력하게 공간 저편으로의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된 느낌이 생긴다.”


문에 관한 짐멜의 단상이다. 문은 외부와의 연결인 동시에 내부로의 단절이다. 열림의 기능을 지니고 있기에 벽과는 구분되면서도, 닫힘의 기능으로만 정체되어 있을 땐 실상 벽과 다름없다. 아니 열리 수도 있다는 그 희망 때문에 더욱 절망인 것이다.


내 앞을 가로막아선 저것이 과연 문일까? 열림의 기능은 이미 경험으로 확인했다. 그 문이 한 번은 열렸었기에 여기로 들어와 갇혀버린 것이기도 하다. 실패를 거듭하고 있음에도 그 방법론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초장에 그 방법론으로 무언가 해결이 되는 듯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문을 해법으로 굳게 믿고 다시 한 번 그 문이 열릴 순간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이 지닌 역설은, 문 자체가 문을 둘러싼 벽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벽이 없는 곳에는 문도 없다. 그것만이 정답이라는 믿음으로 공고해진 사고의 틀은, 우리 스스로가 쌓아올린 벽이기도 하다. 니체의 말마따나, 언젠가 당신을 구원하는 듯했던 것들은 언제고 당신을 옭아매는 굴레가 되어버릴 것이다. 문이라고 믿었던 지점이 벽의 일부였음을 깨닫듯 말이다.


들뢰즈의 철학은, 동양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도무문(大道無門)의 기치이다. 문이 없는 곳에는 벽도 없다. 사방이 길인 곳엔 길이 없다. 듣기에 따라 다소 상투적이고 피상적일 수도 있는 레토릭이지만, 우리가 고수하고 있는 방법론들은 또 얼마나 참신할까? 우리는 실상 너무 많은 선택지의 자유 앞에서는 우왕좌왕하기 일쑤이다. 말로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지만, 실상 당장에 열릴 수 있는 문을 찾기에 급급하다.


문이 있으려면 먼저 벽이 있어야 한다. 벽과 문은 서로의 조건이기도 하다. 물론 해석하기에 따라 희망적이기도 하다. 안 되는 방법 끝에 발견하는 희망 같은 것. 다만 사회가 권고하는 '정답'에만 매몰되는 현상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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