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베이컨(화가)의 미학
들뢰즈의 카테고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가이다 보니, 군인들의 관등성명처럼 반사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미학 지식일 뿐, 솔직하니 난 베이컨의 그림은 잘 모르겠다. 그런데 화가 분들과 인터뷰를 하다 보면, 영향을 미친 화풍로서의 그 이름이 심심치 않게 언급된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히스레저의 조커를 구상할 때 프랜시스 베이컨(화가)의 작품을 참조했단다. 베이컨의 작품에서 기관으로서의 ‘얼굴’은 무의미하다. 그저 신체로서의 머리가 있을 뿐이다.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에서는 신체를, 정신분석에서의 충동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직 분화가 되지 않은, 구조화되지 않은 원형질로 들끓고 있는 혼돈. 우리의 감각을 통하여 느끼는 감흥 자체는, 개념과 표상으로 포섭되지 않는, 저런 혼돈의 모습이라는 것. 그리고 그로서의 욕망.
정신 질환자들이 바라보는 세계가 저 조커의 모습이기도 하지 않던가. 아직 질서의 체계로 분화되지도 또한 정립되지도 않은 원형질로서의 혼란. 어찌 보면 병리적 환상은 저 나름대로는 무의식적 열망과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무의식의 가치만을 옹호하는 것이 아닌, 의식과의 균형도 아울러 강변하는 진단이며 처방이다. 무의식을 과도하게 억압하는 의식만큼이나 무의식이 집어삼킨 의식 또한 위험하기는 매한가지. 정신의 문제를 앓고 사는 이들은, 의식 체계로의 승화 방략을 찾지 못해 그냥 무의식에 마그마처럼 녹아 있는 충동대로 일렁이는 것.
크리스토퍼 놀란의 설정 상, 조커의 웃음은 어린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의 흔적이다. 알콜중독자였던 아버지의 광기는, 어머니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집어 들었던 칼을 빼앗아 어머니를 살해한 후, 공포에 질려 있던 아들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 유명한 대사를 던진다. ‘Why so serious?’ 그리고 그 얼굴을 웃게 만들어주겠다며, 아들의 입에 칼을...
조커에게 웃음이란, 그 시절로부터 한 발자국도 걸어 나오지 못한 심리적/육체적 상처인 동시에, 타자에 대한 자아이기도 하다. 타자를 향해서는 웃어보여야 한다는 강박은 정신 이전에 신체가 붙박아 두고 있다. 그 웃음 이면에는 좀처럼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광기의 혼란이 자리하고 있다. 기관으로서의 얼굴은 항상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러나 짙은 화장 너머에는 제대로 된 승화 방략을 찾지 못한 충동이 자리하고 있다. 그 상징성만 취한다면,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욕망의 원형이기도 하다. 융에 따르면 우리의 무의식이 지닌, 의식의 도덕 체계로 다 담아낼 수 없는 그림자다. 라캉의 말을 패러디하자면, 우리는 모두 조커를 지니고 있다.
역설적으로 조커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대상이 다크나이트이다. 배트맨의 대척에 있는 조커, 그 변증의 구도로 정립되는 자신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여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승화의 방식은 배트맨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저지르는 범죄다. 조커는 재물이나 평판 같은 타자의 욕망에도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배트맨만큼은 자신의 존재기반인 단 한 명의 타자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설정 상, 배트맨에게도 트라우마는 있다. 그의 상징이 박쥐가 된 사연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느꼈던 박쥐에 대한 공포를, 범죄를 저지르는 타자에게 돌려준다는 취지에서이다. 저 자신의 정체성을 범죄자에게 기대고 있다는 역설, 배트맨에게서는 개인의 공포가 사회적 정의로 승화된 방식이 조커가 딛고 있는 승화 방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역설. 그렇듯 자아는 타자의 산물이기도 하다.
헤겔의 변증법에는 두 가지 해석 방략이 있다. 정(正)이 반(反)을 거쳐 합(合)에 도달하는 도식과, 되레 反으로부터 正이 발견되는 도식. <도덕경>의 無와 虛 개념을 생각하면 쉽다. '없다'도 '있다'를 매개하고 전제하는 존재와 인식이라는...
밤하늘에서 저 별의 좌표를 확인시켜주는 조건은, 그 별을 둘러싼 뭇별들의 좌표이다. 그렇듯 ‘자아’라는 개념도 타인과의 삶 속에 위치지워지는 나에 관한 해석이다. 때문에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라는 뉘앙스의 레토릭들은, 인간에 대한 인문적 성찰은 다소 부족한, 그러나 결국 그 또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 자기 신념에 취해 쏟아내는 '증상'일 뿐이다. 정신분석이 들여다보는 자아란 그보다는 다소 복잡미묘한 얼개이다.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들끓는 열망은 혼란스러운 시그널이다. 때론 그것이 우리의 존재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질문적 속성이기에, 그 대답으로, 그 불안에 대한 선명한 해석을 위한 노력으로 가시적인 것들에 집착한다. 의식 체계로의 명쾌한 해독은 불가능하기에, 가시적으로 번안이 된 대리물들에 가탁하는 것. 대리물로 나마 그것을 욕망하고 있는 나의 존재가 해명된다고 믿어버리는 것. 우리의 안에서 들끓고 있는 열망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가의 문제와 별개로, 내가 그 대리물들을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핍감을 느끼고 있다는 인과가 성립되면, 그것을 소유하기만 하면 해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장 손쉬운 바로미터가 타자가 공증하는 가치들이다. 루이비통과 포르쉐와 sns의 좋아요 수 같은, 타자의 인정으로 환산되는, 따지고 보면 나름의 승화 방략이라는 거. 그것으로라도 해소가 될 수만 있다면야 괜찮은 방법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찌 됐건 대리물일 뿐이기에 궁극적인 해소는 불가능하다. 문제는 이에 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들 또한 명쾌하지만은 않다는 사실. 라캉의 말따나 어차피 우리는 결코 거기에 닿을 수 없다. 자존감이란 것도 결국엔 타자와 얽혀있는 자아의 벡터인 바, 스스로에게 허여하고 말고의 성격도 아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행위도 일정 부분은 타자의 가치가 엉겨 있는 법, 우리는 거울을 볼 때도 남들에게 내가 어떻게 비춰질까에 대한 타자의 시선을 전제하는 것이지 않던가. 나르시즘도 타자를 기반한다는 근거가, 나르시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에코'다. 자아는 결국 타자에게 닿고 돌아오는 메아리이기도 하다. 그렇듯 우리는 타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정신분석과 철학은 우리에게서 가능한 최적의 승화 방식으로 예술가적 삶을 제안한다. 삶을 창조적으로 영위하는 예술가적 자아를 키워야 한다는 것. 시장의 요구로부터의 자유, 타인에 대한 의존으로부터의 자유를 소유할 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누군들 이런 삶을 욕망하고 싶지 않겠는가. 또한 먹고 살기에도 바쁘고 힘든 세상에서,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도 한 번쯤 고민해 봐야 문제는, 그렇게까지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닐까?
요즘 같은 시절에는 어렵지 않은 접근성이니, 예술에 관한 취미를 가져보심도... 되레 거기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단서가 발견되기도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베이컨에게서 조커를 발견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