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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Feb 20. 2020

이 회사 안에서 네가 제일 가고 싶은 팀을 골라

복받은 인사팀 막내가 부서를 이동하게 되기까지

살면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는 지금 회사의 인사팀으로 입사한 일이었다. 어쩌면 내 생에 흔치 않게 찾아온 큰 행운이라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대학교 3학년부터 나는 마케팅이나 광고 말고 다른 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온갖 기업의 마케팅 공모전을 기웃거리고 다녔던 것에 비해 실력이 미진한 탓에 입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나름 유명한 광고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한 적도 있었다. 매일 같은 팀 광고기획자(AE) 분들이 일하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창의적이고! 매일 아이디어를 내고! 새로운 걸 창조하는! 기가 막히게도 멋진 광고일을 꿈꾸기도 했다. 취업 시즌이 되었을 때 나는 채용 공고가 뜬 광고 회사 & 대기업의 마케팅 부서로만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내가 입사한 회사에서 실수를 했다. 나는 마케팅 부서로 지원을 해서 마케팅팀의 면접관 앞에서 면접을 봤고, 넉넉한 점수로 합격을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인사팀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때 마케팅팀에 합격했다는 건, 입사 후에 채용 시스템에 남겨진 나의 면접 기록을 조회해서 알 수 있었다.) 발령의 이유는 마케팅 부서에 TO가 없었다는 거였는데, 그럴 거면 애초에 왜 채용 공고를 냈고 왜 면접까지 보게 했는지 모르겠다. 곧 나를 뽑아준 문제의 인사팀으로 입사를 했지만 막상 그들의 일원이 되자 나는 이력을 파헤치는 대신 조용히 순응해버리고 말았다.


그때 마케팅이 아니라 인사팀으로 입사하게 되어 진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사실 나는 꽤 기쁜 마음으로 인사팀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졸업 직전 취업을 준비하면서 하도 많은 입사 박람회와 채용 설명회를 다녔기 때문에, 그때마다 빛나는 정장을 입고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채용 담당자들에 대해 어느 정도 환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인사 일이 그렇게 늘 삐까번쩍한 일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며칠 걸리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생각지 못하게 맡은 업무가 나는 꽤 마음에 들었다. 70명이 넘는 입사 동기들을 챙기고 입사한 지 3개월 뒤에는 팀장님의 지원을 받아 신입 사원들을 위한 파티도 열었다.



나에게 더욱 행운이었던 건, 내가 속한 부서의 담당 임원의 배려와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부서 상무님은 내가 마케팅팀으로 합격을 했지만 내부 이슈로 인사팀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에 늘 마음 써주셨다. 그래서 인사 업무 중에 마케팅 부서와 관련된 업무 회의가 있으면 종종 나를 데리고 가주셨고, 해당 부서장들과 점심을 먹으면서도 "이 친구 영어와 중국어에 모두 능통한 친구니 2-3년 뒤에는 마케팅에서 일하고 있을지도 몰라요."라고 나를 내세워주셨다. (그렇지만 상무님, 저 둘 다 그렇게 능통하지는 않은데요...) 때문에 나도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커리어 계획을 생각할 때 인사 업무로 쭉 전문화하는 방안과 인사 업무를 조금 겪다가 다른 부서로 전환하는 방안을 모두 고려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입사 1년 뒤, 나는 팀장님과의 연말 면담에서 폭풍 오열을 하게 된다.


인사팀에서의 1년이 무척 행복했다. 함께 일하는 팀원들 모두가 너무나 좋았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나는 인사 기획 업무와 성향이 잘 맞지 않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업계 트렌드를 알고 싶고, 늘 다른 부서, 다른 회사 사람들과 만나며 회의도 하고 싶고, 끝장 회의 같은데 들어가서 서로 열 올리며 토론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내가 맡은 인사 업무는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혼자 엑셀이나 피피티 작업을 하는 일이었다. 간혹 업무 회의를 진행하는 경우도 의사 결정 사항을 전달받는 수준이었고, 참가자들의 의견이 바쁘게 오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입사한 지 1년이 지나고 연말 평가 면담 시간이 되자 나는 바짝 긴장한 채 회의실에 들어갔다가 끝내는 펑펑 울며 팀장님께 고백했다. 팀장님, 이 팀을 떠나야 하는 건 너무 슬픈 일이지만 저는 아무래도 다른 업무가 하고 싶어요... 당시 팀장님으로서는 엄청 당황스러우셨을 거다. (그때 나는 25살이었다.)


그래도 팀장님은 나의 눈물 콧물 섞인 호소를 받아들어주셨다. 다만 당장 팀을 이동하면 업무에 공백이 생기니까 후임자를 뽑아 인수인계를 모두 마치고 보내주신다고 했다. 그 면담이 끝나고 실제로 새로운 부서로 이동하는 데는 10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10개월은 체감 상 절대로 길지 않았다.



인사팀 막내가 팀을 이동하는 법


그때 연말 면담에서 내가 부서를 이동하고 싶다고 했을 때 팀장님이 나에게 물어보셨다. 그래서 네가 가고 싶은 팀은 있니? 나는 머릿속에서 바로 마케팅을 떠올렸지만, 잠시 멈춰 고민을 해야 했다. 인사팀에서 만 1년을 일하다 보니 이제는 조직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내가 입사  면접을 봐서 합격했던 마케팅팀은 내가 생각했던 '마케팅' 하는 곳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중국 영업팀이었고, 법인과 판매점을 관리하며 엑셀로 판매 물량을 체크하고 관리하는 팀이었던 것이다. 내가 학생 때 막연하게 생각했던 마케팅은 오히려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조직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조직 외에 상품 기획부서에도 관심이 갔다. 오히려 새로운 상품/서비스를 아이디에이션 하고 소비자 조사를 하는 일은 그쪽의 역할이었다. 지역 영업을 할지,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을 할지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안에서도 전시회 기획을 할지, 인스토어 마케팅을 할지, 디지털 마케팅을 할지), 상품기획을 할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많았다.


내가 망설이고 있자 팀장님은 클리넥스 휴지를 나에게 건네며 말씀하셨다. 회사 안에 여러 부서가 있으니까,

네가 제일 가고 싶은 팀이 어딘지 천천히 잘 고민해봐.


물론 내가 가고 싶은 팀을 아무거나 고르면 무조건 갈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회사 내부적으로 TO도 있고, 받는 쪽의 팀장도 나를 승인해줘야 할 테니까. 그래도 나는 어느 팀이든 TO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알게되는 곳에 있었다. 게다가 나에게는 회사 안에서 가장 든든한 빽이 있지 않았던가. 무려 인사 팀장님이라는 빽이 (더불어 곧 인사 부서의 임원이라는 빽도 추가되었다).


심지어 빽이 다가 아니었다. 내 자리 위에는 회사 조직도가 B4 용지로 프린트되어 딱 붙어 있었고, 업무 폴더 에는 회사 내 모든 부서의 Mission과 R&R과 팀 조직도가 ppt로 정리되어 있었다. 회사 인사팀에서 채용 설명회에 사용하는 Job Description 별 업무 소개서도 있었는데,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기까지의 daily 스케쥴 샘플, 요구되는 자질과 능력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또한 나는 당시 평가 담당자였기에, 원하는 부서의 팀장의 평가 이력을 인사시스템에 검색해볼 수도 있었다(!) 정말이지 모든 툴을  갖춘 부서 이동 희망자라고   있겠다.





그렇게 나는 지금의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다. 회사 내에서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부서로! 처음 새로운 사무실로 출근하던 날, 인사부서의 상무님은 직접 나를 데리고 새로운 부서의 상무님 집무실로 들어가 "우리 직원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인계해주셨다. 그 후 인사팀의 팀장님은 나를 새로운 팀의 자리로 데리고 가 새로운 팀장님께 똑같이 나를 부탁하고 가셨다. 회사 생활 이제 11년 째, 나는 아직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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