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이었다.
학원 끝나고 집에 오니 선우 방에서 펑! 소리가 났다. 방문은 잠겨 있었다.
방 안에서 쨍그랑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야, 왜 그래? 문 열어 봐."
선우 방문을 두들겨도 안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방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려고 문 앞에 귀를 바짝 갖다 댔다. 물건 부수는 소리가 끝난 방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엄마는 불안해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애를 태우며 집안을 서성거렸다.
한참 후, 아빠가 퇴근해 돌아왔다.
내 얘기를 들은 아빠가 선우 방문을 두들겼다.
"선우야, 문 좀 열어 봐!"
선우는 문을 열지 않았다.
"이선우. 문 열어. 문 못 열어?"
아빠는 부술 것 같은 기세로 문을 발로 쾅쾅 찼다.
잠시 후, 선우가 문을 열었다.
방으로 들어간 아빠는 아수라장이 된 방안의 풍경을 보고 얼굴빛이 변했다. 아빠는 험악한 표정으로 선우를 때릴 듯이 하다가 후! 한숨을 쉬며 평정심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곧이어 마른세수를 하듯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진정을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선우가 침대 위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빠가 선우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선우야.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힘들면 말을 해야 알지. 응? "
아빠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가! 내 방에서 나가라고!"
선우가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은 예전의 선우가 아니었다.
"선우, 너 왜 이렇게 변했어?"
아빠는 당황하며 선우를 바라보았다.
"아빠! 일단 나와."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내가 아빠의 허리를 감싸 안고 억지로 선우 방을 나왔다.
아빠는 현관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다음 날, 아침에 학교에 간 선우가 밤이 돼도 들어오지 않았다.
선우 친구 집에 전화하려고 해도 아는 친구가 없었다. 그동안 선우는 친구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선우는 방에 있는 TV며 집기들을 야구방망이로 다 때려 부수고, 말없이 가출했다. 휴대전화는 깨져 방바닥에 짓이겨져 있고, 달리 연락할 곳도 없었다.
가족들은 밤늦게 선우를 찾아 나섰다. 우선 집에서 가까운 초등학교로 갔다. 학교 정문은 잠겨 있었다. 당직 교사에게 전화로 협조를 구해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교무실이 있는 본관 쪽으로, 나는 엄마와 함께 급식실이 있는 후문 쪽을 훑었다. 혹시나 몰라서 화장실 뒤편, 쓰레기장까지 으슥한 곳은 다 찾아다녔다. 없었다.
또다시 선우가 다니는 학원가 미술학원 주위를 찾기 시작했다. 선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밤의 흥청거림과 사람들의 물결로 또 다른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골목 뒤에 자리한 모텔, 현란하게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술집과 노래방. 그런 곳에 가 있을 상상을 하며 선우의 얼굴을 떠올려 봐도 도저히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피시방을 찾아다녔다. 피시방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한 채 청소년들이 게임에 빠져있었다. 그 한쪽 구석에 검은 모자를 눌러쓴 선우가 웅크리고 있지나 않을까 했던 식구들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선우 방에는 깨진 집기들과 유리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엄마는 그것들을 치우고 선우를 기다렸다. 나는 무작정 가출한 선우가 밉고, 짜증이 났다. 해야 할 공부는 산더미처럼 많은데 선우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사흘째가 되자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선우만 생각하면 밉고 짜증이 나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였다. 사고가 난 걸까.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소식이 없을 리 없었다. 기껏해야 하루 이틀 있다가 돌아올 줄 알았다. 거리에 구급차가 지나가면 그 속에 선우가 있는 것만 같았다.
밤이 되자 엄마는 선우를 찾겠다고 집을 나섰다.
“엄마, 어디 가?”
“이대로 앉아서 기다릴 순 없잖아. 어디든 찾아봐야지.”
엄마 혼자 보낼 순 없어서 엄마를 따라나섰다.
“넌 공부해. 나 혼자 갔다 올 거야.”
“이 상황에서 공부가 돼?”
나는 엄마에게 짜증을 냈다.
지하철에서도 엄마는 내내 말이 없었다.
서울역. 엄마가 내린 곳이었다.
나는 엄마를 뒤따라갔다. 엄마는 서울역 지하도를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선우가 여기 있을 것 같아.”
엄마가 중얼거렸다.
엄마와 나는 선우를 찾기 위해 노숙인들을 찬찬히 살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스티로폼이나 라면상자를 깔고 누워있던 노숙인들이 나를 힐끔거렸다. 코를 틀어막고 싶을 만큼 역겨운 냄새가 올라왔다. 헝클어진 머리와 초점 잃은 눈동자로 넋이 빠져있는 엄마의 모습을 본 노숙인들이 소주를 마시며 농 짓거리를 하기도 했다. 키득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엄마의 눈빛은 거리 이곳저곳을 떠돌며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밤거리를 헤매면서 엄마는 울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을 쏟아내는 엄마를 보니 마음이 착잡했다.
선우가 가출한 지 닷새가 지났다. 나는 인터넷에 선우를 찾는 광고를 냈고, 엄마는 선우 사진을 넣어 제작한 전단을 곳곳에 붙였다.
<사람을 찾습니다.>
이름: 이선우 나이: 17세, 키: 178센티 정도.
용모: 얼굴 하얗고 호리호리한 편.
짧은 머리에 교복을 입고 있습니다.
이런 학생을 보셨거나 아는 분은 연락해 주시면 사례하겠습니다.
엄마는 붐비는 지하철역 앞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전단을 나눠주었다.
일요일 아침, 엄마에게만 맡겨두고 볼 수가 없어서 나도 지하철역으로 나갔다. 처음엔 쑥스러워서 그냥 말없이 전단을 내밀었다. 사람들은 자세히 보지도 않고 몇 걸음 못 가서 전단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창피했다. 나는 전단 나눠주기를 멈추고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는 일일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나눠주었다.
"우리 아들이 집을 나갔어요. 이런 아이를 보시면 꼭 연락 부탁드립니다."
엄마는 눈물이 뒤범벅된 얼굴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전단을 손에 쥐여주었다.
사람들은 안 됐다는 표정으로 전단을 들여다보거나, 가방에 집어넣기도 했다.
선우가 가출한 지 일주일째 되던 날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학원으로 가고 있는데, 핸드폰에 발신인 제한번호가 떴다. 선우였다.
"어디야? 지금 어디 있는 거냐고."
나는 급한 마음에 속사포처럼 선우의 거취를 물었다.
선우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여러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형이 아빠한테 말 좀 해줘. 나 안 때리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아빠가 또 때리면 나 절대 집에 안 들어갈 거야.
"아빠가 널 언제 때렸다고 그래? "
"나 가출하기 전날 밤, 아빠가 나 뺨 때리고 발로 찼잖아. 옆에서 봤으면서도 그런 소릴 해?"
"선우 너 왜 자꾸 이상한 소릴 하고 그래? 그날 아빠가 언제 널 때렸다고."
"옆에서 엄마랑 형이랑 다 보고 있었으면서 자꾸 딴소리야!"
나는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선우랑 실랑이하다가는 선우가 전화를 끊어버릴 것 같았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암튼 집에 들어와. 내가 아빠한테 너 때리지 말라고 말할게. 제발 속 좀 그만 썩여 새꺄. 알았어? 집에 들어오라고 했다!"
"그리고 나, 학교 안 다닐래. 엄마 하곤 말이 안 통해. 형이 엄마한테 말 좀 해줘. 안 그러면 나, 진짜 집에 안 들어갈 거야."
뚜, 뚜, 뚜.
공중전화 단말 음이 울렸다.
금방이라도 전화가 끊길 것 같아 나는 앞뒤 재고 말고 할 틈이 없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무조건 들어오라고, 쫌!"
선우의 전화가 끊겼다.
집에 들어간 나는 선우의 전화 내용을 엄마 아빠에게 알렸다.
다음 날, 신경정신과에 상담받고 돌아온 엄마는 아빠에게 의사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
"조현병은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병입니다. 심해지면 환청이나 환시가 나타나요. 아드님에게 자꾸 현실을 인식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부작용이 생기거든요. 그냥 아드님의 말을 인정하고 아빠가 아드님에게 일단, 사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빠는 기분이 썩 내키지 않은 듯 혀를 끌끌 찼다.
그날, 밤늦게 선우가 돌아왔다.
집으로 들어선 선우는 어색한 듯 멋쩍어했다.
남편이 선우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선우야, 너 때려서 미안해. 아빠가 너무 화가 나서 우리 선우에게 손찌검을 했구나. 아빠가 사과할게."
"처음이라 나도 많이 놀랐어. 아빠, 아들을 그렇게 때리면 어떡해? 형은 한 번도 안 때렸으면서 왜 나만 그러냐고."
"그래, 선우야. 미안해. 앞으론 너 때리지 않을게."
아빠는 졸지에 선우에게 폭력을 행사한 아빠로 둔갑해 버렸다.
하지만 아빠는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고 선우에게 사과했다.
며칠 후, 선우는 가족들의 권유로 신경정신과에 가서 검사받았다. 결과는 조현병이었다. 조현병 진단을 받은 선우는 약을 먹은 후부터 평온함을 찾기 시작했다. 비록 자퇴는 했지만, 미술학원도 잘 다녔다. 문을 잠그고 혼자서 보던 TV를 거실에 나와 가족들과 같이 보며 웃기도 했다. 집안엔 모처럼 평화가 찾아왔고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엄마는 안도했고 그대로 그 평화가 집 안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다.
중간고사 준비로 정신이 없던 때였다. 선우 핸드폰 요금이 45만 원이나 나온 달이었다. 엄마는 화를 내며 이유를 물었다. 선우는 말을 안 했고, 통신사에 알아보니 모바일 게임을 많이 해서 그렇다는 거였다. 엄마는 나에게 게임을 못 하게 하는 방법을 알아보라고 했다.
선우가 게임을 하지 못하게 게임 애플리케이션을 잠그려고 하다가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핸드폰을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다 잠가 버린 거였다. 문자도 안 되고 전화 송, 수신도 할 수 없는 먹통을 만들어 놓고 말았다. 아무리 풀려고 해도 되지 않았다.
핸드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간 선우가 갑자기 뛰쳐나오며 내 방문을 벌컥 열었다.
"핸드폰이 왜 안 돼!"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이성을 잃은 선우가 내 뺨을 쳤다.
선우에게 뺨을 얻어맞은 내가 선우를 때리고, 둘이 치고받고 싸웠다.
난투극을 벌이느라 엄마가 들어온 줄도 몰랐다.
엄마가 싸운 이유를 물었다.
"이제 저 새끼 내 동생 아니야! 형, 동생 인연 끊었어. 미친놈. 지긋지긋해. 어려서부터 동생이라고 숙제 도와주고, 뭘 해줘도 고마운 줄 모르고, 저밖에 모르는 새끼. 엄마한텐 아들일지 몰라도 나한텐 이제 남이야!"
나는 소리를 지르며 울분을 토했다.
"너 말이면 단 줄 알아?"
"나한테 동생 없다고!"
"핸드폰이 지 생명줄인 줄 알고 있는 애한테 모두 다 잠가버렸으니, 열받지."
"집 나가서 살고 싶어. 지겨워!"
"너 지금 고3이야. 제정신이야?”
"공부도 지긋지긋해! 변두리 고등학교 다니면서 상위권 해봐야 엄마가 원하는 SKY 어려워. 엄마 나한테 어차피 실망할 거고, 되지도 않는 공부, 다 때려치울 거야."
"너 말 다 했어? 그럼 나가서 뭐 할 건데?"
"뭘 해도 지금 이 생활보다 나을 거 같아. 벗어나고 싶다고!"
화가 난 엄마가 큰소리로 선우를 불렀다.
"너, 뭐야!"
"뭐어!"
"우리 집이 이제 막 나간다 이거지? 동생 놈이 형 때리고, 이렇게 막 가자는 거지, 이제. 엉?"
"형이 핸드폰 잠가 버려서 쓸 수가 없는데 어떡해. 문자도 안 되고 전화도 안 되게 먹통을 만들어 놓으면 어떡하냐고!"
"뭐라고 이 새꺄? 니가 전화 올 데나 있어? 미친 새끼!"
"조용히들 못 해?"
엄마가 소리를 빽, 지르고 거실로 나갔다.
삐삐 삐삐삐삐.
아빠가 퇴근해 들어왔다.
집안의 심상찮은 분위기에 놀란 아빠는 한참 서 있더니,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지나자 씻는 물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말했다.
"선우는 오늘부터 핸드폰 압수야. 전화 요금이 45만 원이 나왔어. 아프다고 학교 자퇴하고 집에 있으면서, 게임질로 핸드폰 요금을 그리 많이 나오게 해? 그래놓고 뭘 잘했다고 형을 쳐, 치긴. 그럴 거면 다시 나가서 네 맘대로 하고 살아."
선우는 얼굴빛이 변하며 말했다.
"안 나가! 내가 왜 나가? 형보고 나가라고 해!"
한번 가출했던 경험이 있는 선우는 가출의 혹독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가방에 옷들을 쑤셔 넣었다. 이 상황이 숨 막히고 지겨웠다.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디로 갈 건지 정해놓은 건 없었다. 일단 혼자 자취하는 진영이네 집으로 가서 궁리해 볼 생각이었다.
"너, 진짜 이럴 거야?"
엄마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소리를 질렀다.
"동생하고 싸웠다고 기어이 집 나가겠다고, 이게 진짜!"
"나는 이 집에서 뭐야? 고3 수험생 맞긴 해?"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집은 고3 수험생 공부 방해될까 봐, 쉬쉬하면서 조심한다는데, 우리 집은 뭐냐고. 선우 때문에 나는 이 집에서 찬밥이잖아. 맨날 선우, 선우, 선우!"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순간 아차 싶었다. 평소에 품은 불만이 나도 모르게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고 말았다.
"정우, 너 지금 뭐라는 거야. 엉?"
"당신은, 이리 와."
이를 바라보고 있던 아빠가 방에서 손짓하며 말했다.
"정우 말하는 거 봐봐. 기어이 집 나가겠다고 저러는 거잖아 지금."
"니들 둘 다 이리 좀 와 봐."
아빠의 말 한마디에 둘은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정우 너, 굳이 나가고 싶다면 아빠는 말리지 않아. 나가는 건 오늘 밤 아니라도 좋다. 언제라도 나가고 싶을 때 나가. 아무리 고3이라도, 아빠는 너 붙잡지 않아. 그리고 정우 너, 나가면 그날로 끝이야. 아빠는 너 다시 안 봐."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아빠는 무섭고 단호했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어떻게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막상 화가 나서 가출을 한다고 소동을 피웠지만 막막했다. 집안 분위기가 싫고, 선우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우가 밉고 싫었다. 선우만 없어져 버리면 집안 식구들이 편하게 살 것 같았다. 고3이라는 중압감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던 때였다. 화를 절제하지 못한 나의 경솔함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상위권이라고 해봐야 지금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내 정도의 실력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은 뻔했다. 선우 때문에 그런지 엄마는 나에게 갖는 기대감이 컸다. 잠시라도 공부를 게을리한다 싶으면 엄마는 나를 채찍질했다. 일찌감치 공부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던 선우를 대하는 것과 달리, 엄마는 나에게 공부에 대한 집착을 보였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말하곤 했다.
"선우가 저러니, 너라도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지."
엄마는 선우에게 겪은 낭패감과 실망감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이 나에게 정성을 쏟아부었다. 족집게 과외 선생을 모셔와 비싼 금액을 주고 과외를 받기도 했다. 선우가 저런 병에 걸렸으니 나는 그저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는 엄마였다면 내가 편했을까? 엄마는 선우가 저러니, 그나마 공부 잘하는 나에게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실력으로 엄마가 원하는 SKY는 절대 못 간다. 엄마는 보나 마나 재수를 하라고 할 것이고, 또다시 되지도 않을 공부로 일 년을 허비한다는 건 정말 못 할 짓이었다. 일 년 재수해서 더 나은 대학에 간다는 보장도 없었다. 재수하기 싫어서 점수에 맞춰 원치도 않은 학과에 입학해서 억지로 대학에 다닌다는 것도 고역이긴 마찬가지일 거였다.
공부는 해도 해도 성적은 늘지 않고 미로 속에서 헤매는 느낌이었다. 선우 일도 겹치고, 여러 가지 쌓인 울분과 스트레스가 터져 나온 거였다. 그렇다고 이 시점에서 가출한다면, 그건 엄연한 회피였다. 선우가 꼴 보기 싫어서 나간다 해도, 날마다 선우 때문에 고통받는 엄마를 외면하고 홀가분하게 나갈 순 없었다. 그 상황을 뻔히 아는데, 엄마에게만 고통 분담을 미룬 채 나만 혼자 쏙 빠져나갈 순 없는 일이었다. 그건 비겁한 행동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시계는 새벽 2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안방에 들어가서 잘못을 빌어야 할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 있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로 시작한 편지를 쓰고 읽어 보니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편지를 찢어 휴지통에 구겨 넣었다. 피로감과 함께 잠이 쏟아졌다.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날, 어색한 표정으로 일어나 아침밥도 먹지 않고 학교로 갔다. 언젠가 기회 봐서 엄마에게 사과해야지 생각했으면서도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엄마는 가출하지 않고 조용히 학교에 다니는 나에게 안도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