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어들은 유연하게 꼬리를 흔들며 수초사이를 빠져나온다. 그곳은 깊은 해저처럼 아늑하다. 수초들 사이사이 놓인 돌 표면에 초록 이끼가 무성하게 자랐다. 어항 속은 싱그러운 기운이 물씬 감돈다. 몸속에 형광물질을 달고 다니는 네온테트라 무리가 중앙으로 몰려온다. 수초들 사이로 꼬리를 활짝 편 구피들이 네온테트라 뒤를 따라간다. 측면여과기에 노랗고 동그란 알들이 붙어있다. 제브라디오가 산란을 한 모양이다. 산란 상에 새끼를 낳아야 하는데, 매번 엉뚱하게 측면여과기에 산란을 하는 바람에 알들은 다른 물고기의 먹이가 되어버린다.
수족관을 들여다보던 여자의 눈이 커진다. 뭔가 예사롭지 않은 조짐을 발견한 듯, 여자는 수족관 유리 앞면에 눈을 바짝 갖다 붙인다. 블루그라스구피 꼬리 부분에 하얀 반점이 붙어 있다. 마치 소금 알갱이가 붙어있는 것 같다. 자세히 보면 블루그라스구피에만 하얀 반점이 있는 게 아니다. 다른 구피들도 마찬가지다. 여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다 인터넷 검색창에서 수족관 수리점을 찾아 전화를 건다.
남자는 아크로빌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대리석으로 장식된 엘리베이터 안은 고급스럽고 중후한 느낌이 난다. 남자는 1805호라고 말했던 여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며 18층 버튼을 누른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여자의 집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남자는 초인종을 누른다. 누구세요? 인터폰에서 젊은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수족관에서 왔습니다. 남자가 닫힌 문 앞에 대고서 말한다. 인터폰 화면으로 고무호스를 둘러 맨 남자의 모습을 확인한 여자가 문을 열어준다.
여자는 삼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인다. 몽환적인 눈빛과 갸름한 얼굴모양이 남자의 눈길을 끈다. 여자는 눈을 내리깐 채 한쪽으로 비켜서서 남자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다.
남자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선다. 은은한 라일락꽃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실내는 17평쯤 되는 원룸이지만 불필요한 가구나 장식장이 없어 정갈해 보인다. 벽 쪽으로 침대를 마주한 자리에 커다란 수족관이 놓여있다. 남자는 수족관 앞으로 가기 위해서는 여자의 침대 옆을 지나쳐야 한다는 사실에 쑥스럽고 난감해진다. 어색한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서인지 헛기침을 몇 번하며 수족관 쪽으로 다가간다. 숲처럼 우거진 수초들과 산호초 사이로 몰려다니는 열대어들의 모습은 바닷속을 연상케 한다.
-백점 병이군요.
열대어들을 들여다보던 남자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여자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치료는 간단해요. 먼저 수온을 올려주고 약을 투여하면 되니까요.
말을 마치고 난 남자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표정으로 여자를 건너다보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치료해 달라고 말한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고기에겐 가장 흔한 질병이니까. 치료하면 금방 나을 수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안심시킨 뒤, 사이펀으로 수족관 물을 뺀다. 사이펀과 연결된 고무호스에서 빠져나온 물들이 욕실 바닥으로 쿨럭쿨럭 토해져 나온다. 물고기들을 뜰채로 건져 약간의 물과 함께 플라스틱 양동이에 옮겨 담는다. 수초를 꺼내고 여과기를 들어낸다. 수초와 수족관에 장착된 기구들을 욕실 바닥에 놓고 샤워기를 틀어 꼼꼼히 씻어 내린다.
알들은 어떡해요. 여자가 말끝을 흐린다. 남자는 여자의 말을 흘려들으며 씻어낸 기구들을 수족관에 장착한다. 찬물과 더운물을 적당히 섞어 수족관의 온도를 맞춘다. 수족관에 치료약을 풀고 있던 남자는 멀뚱하게 서있는 여자를 곁눈질로 훑어본다. 여자는 플라스틱 통 속의 열대어들을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다. 여자의 얼굴은 예쁘긴 하지만 인형처럼 무표정해서 감정이라곤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자는 긴 머리카락을 한 올도 흘러내리지 않게 뒤로 빗어 묶었다. 여자의 얼굴은 핏기하나 없이 창백하다.
욕실로 들어간 남자는 물을 받으며 침대 위를 훔쳐본다. 얇은 베이지 색 모포가 펼쳐져 있는 침대 옆에는 원목으로 된 책상과 화장대가 놓여있다. 수돗물 흐르는 소리가 조용한 집안을 가득 메운다. 수족관에 물을 채우고 콘센트에 연결시키자 산소여과기에서 기포가 올라온다. 남자는 플라스틱 양동이에 있던 열대어들을 조심스럽게 수족관 안으로 부어 넣는다. 수족관 청소가 끝나고 출장비와 청소비를 말하자 여자는 남자의 눈길을 피하며 돈을 준다. 남자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망설이다가 그냥 현관을 나온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