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 되겠다. 너 나가. 그냥 나가서 살아.
시작은 좋지 않았다. 냉기에 의해 팽창한 콜라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터져 까만 물로 범벅이 되어버릴 때까지. 아마도 당신에게 영원히 상처일 내 가족이자 당신의 가족들을 들먹여가며 한참을 쏟아냈었다. 나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대신 서늘한 정적을 선택했다. 그래 나간다 나가. 그 정적 속에서 고요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을 더듬었다. 당신을 이렇게 미워하게 된 게 언제부터더라.
20대 초반, 부모님의 이혼 후 어머니가 가장 먼저 집을 떠났다. 어머니가 떠났을 때 나는 어머니가 새로운 삶을 향해 날아간 것처럼 보였다. 20년 넘게 짊어져 온 가정의 무게를 내려놓은 어머니는 생기가 가득했다. 다음은 형이 독립했고 그렇게 남은 두 사람. 아버지와 나는 마치 백지에 색을 채워 나가듯, 한 사람씩 비워져 갔던 공간들을 나누어 가졌다. 여긴 아버지의 작업방, 저긴 나의 옷방. 떠난 사람의 안온함은 물건을 가득 채워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 갈 때쯤, 때마침 시작된 보일러 공사 때문에 공간의 차가움은 배로 느껴졌다. 네 사람이 두 사람이 된 공간의 서늘함. 종종 마주쳤던 서로의 깊은 한숨과 쓸쓸한 시선들까지 왠지 서로를 더 서먹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를 수식하는 것들 중 좋은 것을 찾아내긴 쉽지 않다. 독하고 모진 아버지의 고집과 무심함, 종종 눈과 귀를 의심하게 하는 위생관념들은 아버지의 많은 장점마저 바라보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게 백날은 미워하다가 뜻밖의 자상함, 또는 나약함을 마주하면 왠지 모를 그리움이 뒤엉킨 복잡한 감정에 휘말렸다. 나, 당신을 이렇게까지 미워해도 되나. 인간은 원래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데. 집 나오면 괜찮아져. 혼자 살아야 돼. 그럼 돼. 아버지와 더 자주 싸웠지만, 독립 후 싹싹하고 사이좋은 아들로 변모한 형의 사례를 보고 결국, 나는 그 불완전한 관계 속에서 독립을 결심했다. 이 집을 떠나야만 못 찾았던 내가 찾아질 것 같아서. 아버지와 멀어짐이 곧 아버지를 완전히 이해함 같아서.
부동산에서 소개해주는 새로운 집들은 빈 공간에 오로지 나의 색만으로 채워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가득했다. 공간에 대한 기대와 실망, 들끓는 각종 사기 대한 긴장이 반복되는 몇 개월을 보내니 계약 날이 다가왔고, 이사 날이 다가왔다.
- 나가 산다니까 좋아?
- 좋을 게 뭐 있어. 섭섭하지.
- 언제는 빨리 나가라면서요;;
- 그냥 걱정도 되고. 나 혼자서 괜찮을까.
- 아빠도 다시 독립하는 거라고 생각해.
- 내 집에 내가 계속 남아있는데 무슨 독립이야.
- 집도 가까우니까 자주 올게. 아프거나 하면 전화해?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혼자가 된 가족. 되돌아보면 우리 가족의 독립은 단순히 물리적 독립이 아닌, 곪았던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상실에서도 의미를 찾아내듯이, 헤어짐의 씁쓸함 속에서도 고유한 방식으로 상처를 덮어간다. 서로의 독립이란 어쩌면 서로를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다시는 한 공간에 함께하지 않더라도 나아가는 발걸음은 어쩐지 닮아있기도, 여전히 서로 속해있기도 하니까.
그러니 이제 빈방을 비우며, 당신에 대한 미움과 용서의 반복을 끝낼 수 있을까. 당신의 멀어진 등을 이해와 사랑으로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