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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Nov 21. 2021

시어머니가 얘기 좀 하자고 하셨다


집에 돌아가려고 짐을 싸던 중이었다. 1박 2일을 머물다 와도 가족이 움직이면 소소한 짐을 쌌다 푸는 게 일이다. 거의 20년에 이르니 예전처럼 오래 걸리진 않는다. 다만 시댁에서 집에 돌아갈 때는 신경이 쓰인다. 아이들 어릴 때 옆에서 칭얼대는 애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칫솔이니, 장난감이니 사소한 물건을 두고 오면 시어머니는 꼭 "얘, 너 또 물건 두고 갔더라. 지난번에도 그러더니!"라며 타박하듯 말씀하셨다. 지금 같으면 "아이고, 어머니 저도 애 둘이 옆에서 우는데 그럴 수도 있죠. 다음에 갈 때 찾아가면 되는 거잖아요."라며 그냥 한 마디하고 넘어갔을 텐데 숫기 없는 젊은 엄마는 변변한 대꾸조차 못하고 그렇다고 대범하게 잊지도 못하고 마음속에 서운함을 쌓아갔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러지 않으시는데 감정이란  이상하다. 10  전에 겪은 불쾌하거나 서운한 상황이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것처럼 머릿속에서 재현되곤 한다. 감정에는 시간이 없기 때문일까. 풀리지 않은 해묵은 감정은 아무리 랜 시일이 흘러도 당장 오늘 일어난 일처럼 똑같이 느낄  있다. 잠깐 옛날 생각을 하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캐리어 자크를 올렸을 때다.


"얘, 짐 다 쌌니?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방문을 열고 시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무슨 일이지? 평소에 시어머니랑 둘이 마주 앉아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던 터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제는 둘이 말할 기회를 내 쪽에서 안 만들었다는 편이 맞다.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약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부엌 옆에 딸린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꽉 닫은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에미야, 혹시 내가 너한테 뭐 서운하게 했니?"

"네? 아... 어머니 제가 뭐 서운하게 해 드렸어요?"

"아니, 난 주변 사람들한테도 우리 며느리 똑똑하다고 항상 자랑하고,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어째 예전처럼 말도 많이 안 하고, 나한테 서운한 게 있는 사람처럼 그러니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너무 많은 말이 떠올랐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순간 고민했다. 말해봐야 별 소용없지 않을까? 과거에도 그랬잖아. 망설이다가 그래도 절반이라도 말씀드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질문 자체가 예전과 달랐다.


"음, 그건 두 가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저도 이제 애가 고등학생이잖아요. 제가 언제까지 갓 결혼한 새댁처럼 시부모님을 대하기는 사실 좀 어려워요.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제가 변한 것도 있고 주변 상황이 변한 것도 있고요.

애들이 크면서 물리적으로는 신경이 덜 쓰여도 요즘엔 애들 학교 생활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애들 학교에 거식증이었던 애, 자살 소동 벌인 애, 갖가지 어려움을 겪는 애들이 옛날보다 많아졌잖아요? 요즘 애들이 물질적으론 풍족해 보여도 정신적으로 힘든 경우가 많은데 우리 애들도 그 속에서 살다 보면 예전에 어머니 세대에서는 겪지 않았던 복잡한 상황이 생기고, 때론 어른이 개입해야 하는 일도 있고 그래요."

"그래, 맞아, 나도 그때 이야기 듣고 깜짝 놀랐다. 이제 열몇 살 된 애들이 거식증이니, 자살이니, 그게 웬 말인가 했다."

"그렇죠, 입시 제도도 복잡하고... 제가 예전만큼 시부모님께 신경 쓰기가 좀 어려워요. 저희도 사는 게 너무 바쁘고 숨찬 거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사실 어머니 저랑 얘기해도 어차피 90프로 이상 애들 아빠 이야기만 하세요. 제 이야기를 해도 그렇게 관심을 보이시지 않고 기억도 못하시고..... 그러다 보니 굳이 저랑 이야기를 해야 할까 싶은 거죠. 그냥 아들하고 직접 이야기 나누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unsplash

그리고 말씀드리는 김에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가끔 어머니는 그 90프로 이야기 속에 '니가 남편 내조 잘해야 너도 먹고 산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어머니 세대는 그게 맞았을지 몰라도 저희 세대는 여자도 똑같이 학교 다니고 똑같이 직장 다닐 수 있다고 교육받았잖아요. 어머니 입장에서는 제가 남편에게 얹혀사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저는 정년 보장된 직장도 애들 아빠 설득으로 그만두고 내려와서, 그 뒤로도 몇 번 일할 기회가 왔어도, 연고 없는 타지에서 도저히 애들 키우며 직장 다닐 상황이 안 돼서 못 한 거잖아요.

제 입장에선 가정을 위해 제가 희생한 거거든요. 서울에 살았으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일도, 기회를 마다할 일도 없었을지 몰라요. 그런데 자꾸 그런 말씀하시니, 어쩔 때는 좀 불편하고 서운했습니다."


"아이고, 그랬구나. 나는 워낙 시골 동네에 살았잖니. 나 때는 동네 어른들 길에서 마주쳤는데 '안녕하세요'만 하고 지나치면 욕먹었다. 잠깐 집에 와서 차 한 잔 하시라고 말 안 하면 저 새댁 예의 없다고 두고두고 욕먹었어. 그런 세상에서 살았던 사람이니 너랑 느끼는 게 달랐을 수 있겠다. 니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어. 진작 말하지 그랬니?"


"하하, 어머니, 저는 직간접적으로 많이 말씀드렸고 싸인도 자주 보냈어요."

"아, 그래. 내가 잘 못 알아차렸나 보다."

"네, 어머니 삶이 달랐던 건 저도 알겠어요. 어머니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요. 그런데 어머니랑 저랑 자라온 배경이 다르고 세대가 다르잖아요. 어머니 삶이 있듯이 제 삶이 있는 건데 자꾸 어머니가 살아온 방식으로 살라고 하시면 아무래도... 힘들어요."

"그래, 너랑 이런 이야기 하니까 니 마음을 알겠고... 좋구나. 내가 통화할 때마다 그렇게 애비 얘기만 했었나."

"네, 어머니, 아들이라면 워낙 끔찍하시잖아요."

"아들한테 끔찍하지 않은 엄마도 있나."

"음, 그렇긴 한데 어머니는 같은 세대 어머니들 중에서도 좀 많이 끔찍하신 편이에요."

웃으면서 말했더니 어머니도 같이 미소 지으셨다. '어머니, 중년 문턱을 훌쩍 넘어선 아들을 두고 우리 아들 한겨울에 추울지 모른다고, 내복 꼭 입히라는 그런 잔소리하시면 며느리 입장에서는 별로 전화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애들 아빠 내복 절대로 안 입는데 아직도 모르셨어요? 법륜스님이 결혼하면 아들이고 딸이고 딱 떠내 보내고 내 남편, 내 아내 잘 챙기고 살래요.' 이 말은 마음속으로만 했다.




좀 긴장한 채 들어간 작은방이었지만 어머니도 나도 방문을 나서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한때는 어머니랑 갈등이 심했는데 어머니가 윗사람으로서 먼저 마음을 내어주신 것 같아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보통 나이 들수록 더 고집스러워지고 옹졸해진다고 하는데 어머니는 예전과 다르게 내 말에 귀 기울여 주셨다. 켜켜이 쌓인 아프고 힘들었던 감정이 일시에 다 풀린 건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첫발을 내딛도록 이끄는 어머니를 보니, 우리 어머니는 심리학자 에릭슨이 강조한 '노년의 자아통합'을 잘 이루실 것 같다. 노년기에 삶을 음미하고 이해하며 생의 지혜를 얻는 사람은 젊었을 때보다 오히려 더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며 나이 들어서도 계속 성장한다고 했다.


가끔 내 책을 보고 미혼인 사람들이 그런 평을 남길 때가 있다. 이러니 내가 결혼을 안 한다거나, 그러게 뭐하러 가부장제의 족쇄를 제 손으로 채웠냐고. 맞는 말이다. 나부터도 엄마에게 여자한테 이렇게 불리한 결혼은 왜 했냐고 당돌하게 물은 적도 있으니까.

시어머니를 볼 때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손이 무척 빨라서 부엌에서 서너 가지 요리를 동시에 뚝딱 해내는 살림꾼이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금융 지식으로 펀드나 주식에서 큰 수익을 내신 적도 있는 어머니. 가끔 남편이 자기가 학교에서 아이큐 제일 높았다고 장난 삼아 자랑하는데 어머니를 닮아서인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두뇌 회전도 빠르고 무슨 일이든 금방 배워서 응용도 할 만큼 내가 보기에는 여러모로 능력자신데 평생 남편과 자식만 바라보며 사셨다. 나하고는 무슨 말을 해도 서로 닿지 않고 뱅뱅 돌아서 언제부턴가 어머니 앞에서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우린 세월 속에 멀어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어머니하고 마음의 물꼬를 트는 첫 대담(?)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마친 것이다. 마음에 온기가 퍼졌다. 결혼 생활의 묘미란 이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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