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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미 Jul 29. 2021

선생님, 방금 일 년 치 운동 다 한 거 같아요.

     

  낑낑거리며 옷장 구석에 박혀있던 커다란 압축팩을 꺼냈다. 육포처럼 딱딱하게 말라 있던 옷들이 입구를 조금 벌리자 금세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 스키 바지랑 패딩은 여기 있고…. 아! 스키 장갑.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여름날, 나는 두툼한 겨울옷을 바리바리 챙겼다. 스케이트 강습은 얼음 위에서 하니 당연히 꽁꽁 싸매야 한다고 생각했다. 커다란 장바구니가 터질 듯 한가득 옷을 집어넣고 아이 둘과 스케이트 장으로 향했다.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거대한 찜통 같은 고온다습한 날씨였지만 아이스 링크 안은 딴 세상이었다. 고작 입구 문을 열고 들어왔을 뿐인데도 한 계절이 훌쩍 지나간 것 같았다. QR 체크와 이런저런 행정절차를 마칠 즈음엔 어느새 으슬으슬 떨렸다.


- 애들아! 감기 걸리겠다!


  서둘러 아이들에게 스키 바지와 패딩을 입혔다. 역시 나는 준비성이 철저하다니깐, 하는 자화자찬과 함께.


- 오셨어요.


  때마침 코치님께서 찾아오셨다. 자그마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경쾌한 여성분이었다. 옆에는 초등학생 남자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같이 수업받게 될 초등학교 3, 4, 5학년 형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6살, 8살 아들을 포함한 5명의 유초등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게 되는 건가. 선생님께서 선뜻 어른도 수업받아도 된다고 말씀하시길래, 다른 어른들도 많이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유일하다니. 172cm의 내가 초등학생들 사이에 삐쭉 서 있으려니 민망했다.


- 패딩 입으셨네요?


  5학년 형아가 나에게 말을 붙였다. 마치 1년은 알고 지낸 친구에게 건네는 듯 친근한 말투다. 역시 아이들의 친화력이란.


- 응, 추울 거 같아서.

- 후회하실걸요.


  그러고 보니 형들은 선수복을 입고 있었는데 내복처럼 얇디얇았다. 고작 요것만 입고 버틸 수가 있다고? 내 뼛속까지 시린 느낌이었다.


 



- 와! 멋있다!


  스케이트 장 안에 들어온 아이들은 넓게 펼쳐진 얼음판을 보더니 연신 펄쩍펄쩍 뛰었다. 짙게 내리깔린 찬 공기와 기분 좋게 메아리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어릴 적 아빠 손잡고 롯데월드에 입장하던 기분이었다. 설레는 기분을 만끽하려는 순간,


- 자, 훈련 시작합니다!


  선생님이  링크장 구석에서 우리를 불렀다.


  - 자, 쿠션 30개!


  쿠션? 그게 뭐지? 능숙하게 시작하는 초등학생 형들을 보니 스쿼트와 비슷한 동작을 했다. 단지 허리를 앞으로 구부려 스케이팅을 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는 점이 달랐다.


  


  - 어머니, 어서 하세요.


  아들들은 어느새 따라 하고 있었다. 난 스쿼트를 10개 이상 해본 적이 없는 미련한 몸뚱이의 소유자였다. '못해요!' 하며 손사래를 치고 싶었지만 차마 애들 앞에서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무릎을 구부렸다. 우두둑, 관절이 놀랐는지 자기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소리로 강력하게 저항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시작한 이상 해내야만 했다. 하나, 둘, 셋, 넷…. 결국 30이라는 숫자를 힘겹게 내지르며 벽에 털썩 기댔다. 안 그래도 힘든데 마스크까지 쓰고 하려니 숨이 턱턱 막히고 머리가 핑 돌았다.




  - 선생님…. 저 방금 (헉헉) 일 년 치 운동 (헉헉) 다 한 거 같아요….


  선생님은 놀람과 측은, 그 중간 어딘가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시고는 잠시의 쉼을 허락해주셨다. 그런데 가만 보니 나만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나머지 다섯 아이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깔깔거리며 잡기 놀이를 했다. 피로란 모르는 저 파릇파릇한 몸.       


- 자, 다시 30개 시작할게요!

- (으악!)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교과서 단골 문학 표현을 나는 현실에서 구현해냈다.

  땀이 줄줄 나왔다. 푹신한 패딩도, 두툼한 바지도 너무도 답답했다. 5학년 형의 말이 맞았다. 이 옷은 너무 두껍다. 역시 세상은 나이보단 경험치가 우선이다.      


  시계를 봤다. 아직 8분밖에 안흘렀다. 아직 42분이나 남았다. 이런. 이미 운동은 차고 넘치도록 한 거 같은데, 맛보기에 불과했다니. 벌써 너무나 덥고, 답답하고, 힘들다! 네미 살려!        






운동을 좀 하세요. 근육운동이요.    



  얼마 전 허리가 아파 찾아간 병원에서 들은 말이 자꾸 떠올랐다. 으레 하는 말이겠거니 여기며 한 귀로 흘려버렸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명의셨다. 내 체력이 정말 심각한 상태임을 제대로 느꼈다.


  이십 대 때는 이 정도로 형편없진 않았는데..  서른 후반의 몸뚱이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 만나는 나’였다. 이대로 방치하다간 곧 골병들겠다는 생각에 아찔해졌다. 이제는 날씬한 몸매를 위한 운동이 아니다. 살기 위한 운동, 생존 그 자체이다. 기왕 스케이트를 시작했으니 포기 말고 꾸준히 해서 정상인의 근육량과 체력을 만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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