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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미 Oct 22. 2021

첫째 아이 직접 가르치기 프로젝트

나와 두 아이가 함께 스케이트를 탄다고 하면 사람들이 종종 물어보는 게 있다. 바로 비용은 얼마냐는 것. 솔직히 말하자면 꽤 나간다. 그나마 시에서 운영하는 경기장이라 시설료가 저렴해 어마어마하게 큰돈까진 아니지만,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다. 더욱이 미리 예산을 짜고 재정 상황에 맞추어 시작한 것이 아닌, 충동적으로 등록한 운동이었기에 스케이트와 관련된 모든 비용은 우리 가정의 예상외 지출이다. 그러나 가족 모두 만족스럽게 즐기고 있으므로 앞으로 예상외 지출은 계속될 예정이다.  

    

결국 답은 단 하나.

돈 나갈 다른 구멍을 최대한 틀어막자!

의식주와 관련해서는 이미 더 줄일 곳은 없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사교육뿐.


다행히 여섯 살 둘째는 아직 사교육이 필요할 나이는 아니다. 그러나 첫째는 슬슬 공부 습관을 만들어줘야 하는 초등학생이다. 나는 첫째에게 학원을 다닐지, 아니면 스케이트 갔다 온 후 저녁에 엄마 아빠와 공부할지를 결정하라 했다. 당연히 아이는 스케이트가 있는 후자를 골랐다. 남편은 수학을, 나는 영어를 맡기로 했다. 어쩌다 보니 첫째 아이 직접 가르치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첫 스타트는 좋았다. 바쁜 신랑이라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별로 없었는데, 이 시간을 통해 부자간의 시간을 보내길 바라던 내 바람대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수학 문제집을 고른다고 둘이 손잡고 나가 한 손에는 문제집,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기분 좋게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어찌나 뿌듯하던지.   

   

남편은 워낙에 온유한 사람이다. 또 첫째 아이 자체가 수학을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둘의 공부 시간은 화기애애 그 자체. 큰소리 한번 나는 일 없이 아이는 아빠와 정한 수학 문제집 한 장씩을 스스로 풀었고, 남편은 퇴근 후 채점해줬다. 틀린 문제가 나오면 다정히 살펴봐주는 너무나 이상적인 아빠와 아들만의 시간이었다.   

  

문제는 나였다.     

주입식 문법 교육은 지긋지긋했기에, 최대한 아이가 즐겁게 놀면서 배울 수 있는 영어 교재를 원했다. 2박 3일 동안 온갖 영어교육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프로그램을 살펴보고 겨우 한 과정을 결정했다. 애니메이션과 놀이와 강의가 적절히 배분되어 있어 지루할 틈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공부는 공부인 건가. 아무리 현란한 음악과 화면으로 즐거움이 흘러넘치는 동영상일지라도 계속 반복하니 아이가 슬슬 지겨워했다.      


사달이 일어난 건 어제였다. 이날 따라 문장이 조금 복잡했다. 지금까지는 거의 주어 동사 목적어로만 구성된 짧고 간단한 문장이었는데, 처음으로 제법 긴 문장이 나왔다. 몇 번을 반복해도 잘 안되자 첫째의 두 어깨가 눈에 띄게 축 처지고 입은 힘없이 웅얼거렸다. 어렵긴 해도 아예 못 할 수준은 전혀 아닌데, 집중하지 않고 흐느적대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나대로 못마땅해졌다. 예전 읽었던 부모 교육책에서 아이에게 화내는 순간 모든 교육이 끝이라고 했다. 참아야 하느니라를 마음속으로 외치며 내 속의 밝은 기운을 박박 긁어모았다. 그러나 엄마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의 입술은 갈수록 더 붙어버렸고, 컴퓨터에서 나오는 영어 음성은 허망하게 공중으로 흩어졌다.

      

- 집중해서 하고 얼른 끝내자. 지금 같은 문장을 몇 번을 하니?

- 해봐도 잘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아이는 이미 수업에서 마음이 떠난듯했다. 슬슬 흘러내리던 엉덩이는 이젠 의자 끝에 겨우 매달려있는 형국이었다. 결국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터트리고 말았다.    

 

- 너 이럴 거면 하지 마! 엄마는 시간이 남아돌아서 너랑 이러는 줄 알아?    

 

결국 나는 노트북을 닫았고, 아이는 울었다. 아이의 훌쩍거림을 뒤로한 채 미뤄뒀던 저녁 설거지를 괜스레 덜그럭거리며 했다. 사교육비는 부모 자식 간 관계 유지비용이라고 농담처럼 말하던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나의 아이는 아직 어렸기에, 전혀 수긍하지 못했다. 나는 아이와 사이좋게 정을 나누며 사랑과 학습 둘 다 해줄 수 있을 거라 자부했다. 그러나 사람 다 똑같다. 부모가 아이를 직접 가르친다는 건 바다와 같은 인내와 참을성이 필요한 거였고, 난 그럴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수업에서 코치 선생님이 스케이트 기본자세 중 하나인 찍기를 알려주셨다. 한 발을 뒤로 찍으며 보낼 때 나머지 한 발로 버티고 서 있는 것이 관건이었다.



워낙에 하체에 힘이 하나도 없는 나는 한 발을 뒤로 보내기 무섭게 휘청거렸다. 동일한 자세로 최소 3초 정도는 버텨줘야 하는데 나는 1초도 못 버텼다. 정신을 집중하고 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몸이 아예 안 따라와 줬다. 아무리 선생님이 설명을 해주시고, 시범을 보여주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수업이 끝나고 나머지 개인 연습을 해봐도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하여간 이놈의 몸뚱이는 참으로 좌절스럽다. 뭐하나 그냥 되는 게 없다. 그때 첫째 아들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엄마 왜 그래?”

“엄마는 찍기가 왜 이리 안돼냐.”

“그래? 난 그냥 되던데.”


그랬다. 첫째는 찍기를 배우자마자 곧잘 했다. 속도도, 자세도 모두 괜찮아 선생님에게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다.


“괜찮아 엄마. 못할 수도 있지. 힘내.”  


띠로리. 요 조그마한 일학년 남자애에게 위로를 받다니.

그리고는 곧 미안해졌다. 나는 아이가 영어를 못해내고 있을 때, 위로는 커녕 화만 냈는데....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니, 무언가 하고자 하는 게 안될 때 내가 속상했듯, 아이도 속상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왜 나는 아이의 머뭇거림을 보고 화가 난 걸까? 아마 나를 약 올린다고 생각한 거 같다. 아니면 이것조차 못하면 아이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거라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막연한 두려움이었을 수도. 혹은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왜 시간을 지연시키나 하는 조급함도 한 스푼 정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이는 나를 놀리는 것도, 귀찮은 것도 아닌, 속상해서 한 행동이었는데, 나는 그 마음을 위로해주기는 커녕, 당장 제대로 해내라고 윽박지르기나 하다니.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친다는 미명 아래 폭력을 행한 것 같아 부끄러웠다.


'언젠간 다 하게 되더라고요.'


처음 스케이트를 할 때 기초 동작이 힘들어 좌절하고 있을 때, 꾸준히만 하면 언젠가는 다들 일정 수준 이상으로 잘 타게 되더라는 20년 경력의 코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아이도 계속 성장하는 중이다. 아이의 모든 것이 성장의 과정 아래 있다. 나도 그리 헤매던 기초 동작을 지금은 수월히 해내는 것처럼, 아이도 언젠간 해낼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같이 공부를 하게 될 텐데, 엄마도 너에게 말해줄게.     


괜찮아.

그럴 수 있어.

힘내렴.  

사랑하는 우리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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