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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의 습격

by 봄책장봄먼지

#5_주사의 습격



1.02cm랑 1.25cm랑..


"일단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아요. 그래도 조직 검사로 살펴보기로 할게요."

늘 작은 키로 살아서 큰 키가 부러웠다. 크면 다 좋은 거 아닌가? 전철이나 버스에서 높은 손잡이도 손쉽게 잡을 수 있고, 또 바지 밑단도 안 줄여도 되고 또... 기타 등등. 그러나 병원에서만큼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0.8cm 하나, 1.25cm 하나. 그리고 또 하나 더. 다행히 '엄청나게 크지는 않다'며 봄보미의 염려를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어 주려는 의사. 그런데... '왜 자꾸 검사하다 말고 뭘 자꾸 찍으시는 거죠;;' 초음파 검사 내내 의사는 계속해서 동작을 멈추고 뭔가를 찍어 둔다. 알고 보니 혹이 한두 개가 아니란다.


어찌 보면 봄보미, 그냥 아무 의미 없이 늙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혹들과 함께 무럭무럭 자란 거였다. 가끔 찌릿, 마치 눈에 섬광이 비칠 때 겪는 듯한 순간적인 통증이 가슴에도 종종 찾아왔다. 그런 통증들이 혹시, 가슴에 혹들이 (눈치도 없이) 쑥쑥 자라고 있다는 생존의 증거였던가. "그동안 찌릿한 적은 없으셨고요?"라는 의사의 질문에 봄보미는 어쩐지 가슴이 더 뜨끔거린다.


"총 3개를 조직 검사로 살펴볼 거고요, 혹마다 총 3개의 단면에서 하나씩 채취를 할 거예요."

봄보미의 조직은 곧 채집의 대상이 된다. 생살이었던 혹에 주사를 꽂고 근육이었던 자리를 잠시 기절하게 만든다. 그러고는 혹 덩어리를 3층으로 나누어 층별로 조금씩 도려낸다. 그게 봄보미 앞에 앉은 의사의 야심 찬 계획이다. 과연 몇 층에 범인이 숨어 있을지, 숨어 있다면 죄질이 나쁜 놈일지, 계도가 가능한 양심 있는 놈일지, 아니면 아예 얼씬도 못 하게 '접근금지 명령' 같은 것을 내려 싹을 잘라 버려야 하는 놈일지. 너희를 없애겠다고 엄포를 놓으면 봄보미의 혹들은 자신의 주인에게 처벌 불원서라도 요구해 댈까, 그럼 그때 봄보미는 엄벌 탄원서를 제출해야 하는 것일까.


진료실을 나온 봄보미는 '아스피린, 항응고제, 혈액순환개선제 등 지혈을 방해하는 약 복용 시 최소 7일 전 중단해 주세요.'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종이를 하나 받는다. '금식X, 결과는 일주일, 비용은 약 40만 원 이상'이라는 수기(手記)가 덧붙은 그 종이 하나에 봄보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대롱대롱 매달린다. 간호사는 '상의는 편안한 복장으로 입으시고 내원해 주세요.'라는 문구에 특별히 물결무늬의 밑줄을 덧입힌다. 엄숙한 종이 안에서 잠시 춤추는 물결, 편안한 복장을 입은 듯한 물결. 봄보미는 얼마나 편한 복장이어야 하는지 간호사에게 굳이 묻지 않는다. 어떤 옷을 입든 이 상황이 낯설 것이다. 아무리 헐렁하고 편한 옷을 입고 간들, 조직 검사를 하기까지 2주, 하고 나서 1주일, 어떤 옷을 껴입더라도 봄보미의 마음과 봄보미의 몸은, 일어나서 눈뜨고, 누워서 다시 눈 감는 그 하루 내내, 꼼짝없이, 반복적으로 편치만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내 봄보미, 종이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그림 하나를 눈여겨본다. 이거 너무 적나라하다, 종이 위에 마치 자신의 가슴이 누워 있는 것만 같다, 혹 덩어리를 여기저기 안고서... (어여 일어나지 않고 종이 위에 누워 뭐 하는 거니..)


Lt- 6H 1.25cm,

Rt-10H 0.8cm, 6H 1.02cm.


종이 위에는 총 3개의 동그라미. 종이 속 벌거벗은 상체, 그리고 위쪽 두 가슴엔 볼펜으로 그은 동그라미들. 이미 몸에 깊숙이 새겨진 듯, 봄보미는 그 동그라미들이 벌써부터 따끔거린다. 이내 어깨를 움츠려 보지만 찌릿한 느낌이 지속된다. 이 따끔거림이 몸에서 온 증상인지 마음에서 출발한 불안인지는 봄보미도, 초음파를 마친 의사도 아직 모를 것이다. 몸의 불안과 마음의 불안이 서로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옆 레인의 눈치를 보며 무작정 질주를 도모한다. 불안의 질주는 심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봄보미를 자꾸만 두근거리게 만든다.


"침대에서 오른쪽 끝으로 바짝 당겨 누워 주세요. 아니 조금만 더요, 조금 더."

봄보미는 '조직 검사를 해야 합니다' 이후로 2주간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친다. 그리고 이 자리, 드디어 대망의 조직 검사 결승전에 도착하여 골대를, 아니 침대를 눈앞에 두고 온몸을 옆으로 뉜다. 진료실 한편, 커튼이 드리운 곳에서 봄보미는 자신을 차갑게 맞이하는 주사기를 애써 반긴다. (잘 부탁해요, 주사기 씨.)

"총소리가 날 거예요. 제가 미리 들려 드려 볼게요. 탕." 친절이 몸에 밴 듯한 다정하고도 기계적인 의사의 목소리가 봄보미의 두 가슴에 날카롭게 침투한다.

"좀 따끔거리고 아플 거예요."

훅, 아니 푹. 봄보미의 가슴을 찔러 대는 주삿바늘. 이것이 그 말로만 듣던 국소마취의 시작인가. 국소마취는 그간 치과에서뿐이었다. 중학교 때였던가. 잇몸을 난도질하여 사랑니 뿌리를 빼내는 작업이 있었다. 입만 보여 달라는 동그라미 구멍이, 입을 제외한 봄보미의 얼굴 전체를 뒤덮었고 치과의사는 온갖 심혈을 기울여 교정에 방해가 되는 사랑니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한참 후 뿌리를 뽑아 버렸다고 승전보를 알리던 치과의사의 하얀 마스크에는 봄보미 잇몸에서 급히 튀어 나간 핏자국들이 난폭하고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때 그 핏방울들이 문득 떠오르는 건, 봄보미의 가슴을 헤집는 이 주사들 때문일까. 이번에도 동그라미 구멍에 살점을 내맡긴 채, 얼굴을 온통 뒤덮은 초록 헝겊 아래서 봄보미는 조심히 숨을 참아 본다.


"하나씩 마취하고 하나씩 조직을 떼어 낼 거예요. 하나 끝내고 다음 하나, 이렇게요."

조직 검사 무대에 오른 혹 덩어리 하나당 주사는 서너 방. 천천히 몸속을, 살 속을, 심장 속을 파고드는 주삿바늘. 어쩌면 이것은 봄보미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통증의 증거. 그래도 "언제 끝나나요"라는 질문이 첫 마취 주사부터 떠오른다. "아직 멀었어요?"라는 질문이 두 번째 마취 주사 끝자락에 매달린다. 견딜 만하지만 구태 견디고 싶지 않은 시간. 다 끝났습니다, 라는 말이 봄보미의 가슴에 도착하기 전까지, 통증도 삶도 이대로 끝일 리는 없다.


"움직이지 마세요."

간호사의 사전 경고가 떠오른다. 네, 어차피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어요. 마구 쏘아 대는 주삿바늘이 봄보미 가슴뿐 아니라 영혼까지 일순간 마비시켰으니까. 무방비로 영혼이 얼어붙고 "이번엔 좀 더 따끔해요."라는 의사의 목소리와 함께 온몸이 본능적으로 움찔거린다. 그래, 너로구나, 통증. 얼어붙은 영혼을 바싹 추격하는 몸의 날카로운 통증. <Breast CNB 유방조직검사> 제목 밑을 채우던 종이 위의 그 세 동그라미. 알고 보니 그 동그라미들은 봄보미의 구멍이었을까, 아니면 구렁이었을까. (이대로 봄보미, 혹 구렁텅에 빠지는 걸까?)


"이제 침대 오른쪽으로 당겨 앉으실게요."

저기요, '-ㄹ게'는 나의 약속, 나의 의지 나타낼 때 쓰는 건데.. 그렇게 상대방을 주체로 해서는 못 써요. 앉으실게요, 아니고 앉으세요, 라고 해야 하는데... 라는 엉뚱한 생각이 스친다. 마취 탓인가. 직업병 같은 의식의 흐름이 봄보미의 뇌세포를 자극하며 지나간다. 스치는 그 생각 사이로 갑자기 음표들까지 급히 흘러들어 온다. 뭐지? 환청인가??

'어? 내가 아는 노래다, 아는 목소리야.'

언제부터 이곳이 노래였던 거지?


"따끔해요, 따끔." 어린아이 다루듯 의사는 사람에게서 낼 수 있는 밋밋한 다정함을 얹어 봄보미의 잔여 혹들을 파헤친다. "따끔" "따끔" "탕" "따끔" "따끔" "탕" 그렇게 기묘하고도 따뜻한 기계음을 듣다가 문득 봄보미의 귀가 열린다. 환청이 아니다. 미세하지만 이건 음악 소리다. 시술실을 맴도는 음표들의 움직임. 봄보미는 주사의 습격에 몸을 맡기는 대신 음악 소리에 두 귀를 내맡긴다. 지금 봄보미의 가슴으로 흘러드는 노래는, 아이유의 '네버 엔딩 스토리.' 이 시술실에는 잔잔한 음악이 주삿바늘과 함께 춤을 추는 중이다. 봄보미의 끈기와 인내를 위한 연주인지, 의사의 집중력 향상을 위한 연주인지는 아리송하다. 누구를 위한 것이었든 다만 음악은 흐르고 통증은 어느덧 그 가락 위에 올라타 어딘가로 실려 간다. 통증의 하류로, 더 하류로 조금 더 가볍게 음악이 저 아래로 흐른다. 그러는 동안에도 주사는 하나의 조직 검사마다 다시 한번 '따끔'을 시작한다. 의사가 "따끔"이라 말할 때 봄보미는 찔끔, 오금이 저릴 듯한 예리한 통증을 느끼지만 그것들을 애써 모른 척하며, 슬며시 노랫가락에 입을 맞춘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봄보미가 반쯤 돌아서서 마주 본 흰 벽이, 봄보미의 노랫가락에 에코를 넣어 준다.

'함겨워한 날에 너를 지킬 수 없었던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어느덧 봄보미의 입술이 아무도 모르게 가락을 따라 흐른다. (이 와중에도 주사는 푹.) 힘겨워한 날에 봄보미는 봄보미를... 지켜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주사는 또 한 번 푹.) 주삿바늘의 스토리는 '네버 엔딩 스토리'처럼 끝날 줄을 모른다. 음표의 낭만이 흐를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인생'이라는 주사는 또 한 번 봄보미를 습격한다.


"결과가 좋으면 3일 후 문자로 갈 거고요, 아니면 일주일 뒤에 병원에 직접 오셔서 결과를 들으시면 될 거예요." 의사는 안내 사항을 전하며 주사의 서툰 지휘에 조심스럽게 화음을 맞춘다. 찌르고 지르밟고 쑥 빠지는 주삿바늘, 그 다정한 쇳소리, 그 네버 엔딩 스토리.


주사의 습격, 그리고 3일 후...

봄보미의 휴대 전화는 아무런 응답이 없다. (봄보미 폰, 혹 망가진 건 아니겠지?) 봄보미는 그 어떤 연애보다도 더 간절히 주삿바늘의 연락을 기다린다.



(사진 출처: ian-talmacs-WRx5ZxwHh4k-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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