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습격
#10_낭만의 습격
도착. 낭만의 늦은 도착.
마음이 어지럽기 시작하던 한두 달 전 낭만을 주문했다.
'이런. 아직 바늘을 사 두지도 않았는데.'
봄보미는 미처 손님맞이 준비를 하지 못했다. 얼마 전 지지직 소리가 나기에 살펴보니 턴테이블의 바늘이 망가진 상태였다. (코로나 때 잠시 레트로 감성에 빠져 15만 원을 주고 샀던 LP복합기... cd 재생과 라디오, 블루투스까지 되기에 좋~다고 샀는데 라디오는 이제 나오지도 않고 LP 재생도 위태롭다. 게다가 기계 값은 15만 원인데 LP 두세 개 사고 나니 어느새 15만 원이 되어 버렸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낭만이다.)
봄보미는 갑자기 도착한 낭만을 아쉽게 내려다본다. 지금 당장 들을 수는 없어도 마음속으로는 언제든 따라 부르며 연주(?)까지 할 수 있는데... 특히 봄보미가 좋아하는 노래는 What It Sounds Like
https://youtu.be/Ug_pv5-r1js?feature=shared
물론 휴대폰만 들으면 언제든 클릭 한 번으로 무한 반복하여 낭만을 재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봄보미는 턴테이블의 작은 구멍에 널따란 동그라미 판을 끼우고 그 위에 바늘을 얹어, 그곳에서 부스스 깨어 나오는 소리를 듣고 싶다. 재생 시간을 손쉽게 예약해 버린다거나 일정 구간을 계속해서 자동 반복할 수 있는 그런 소리 말고 진짜 소리를, 느리게 흘러가는 대로 그저 놔둘 수 있는 소리를 원한다.
많은 사람이 손쉬운 인생을 위해 효율적으로 살고자 한다. 누군가 쫓아오지도 않았는데 봄보미 역시 그간 자꾸만 달려 나갔다. 어쩐 일인지 달리는 일은 천천히 걷는 일보다 외려 쉬웠다. 그런데도 세상의 속도에 뒤처졌다. (봄보미, 오래 달리기 하나는 자신 있다고, 자부했는데...) 먼저 앞서 나간 친구들은 시험에 합격하여 어엿한 사회인들이 되었고, 봄보미는 경력이랄 것도 없는 부스러기 경험들만 쌓으면서 인생을 꾸려 왔다. 게다가 달릴 힘도 부족하여 요즘은 걷고만 있었다. (아니 그런데도) 그런 봄보미에게 건강 적신호가 퍼지며 '걷지도 말라'는 듯한 경고벨이 울렸다. 인생이 내뿜는 사이렌 소리가 봄보미의 가을을 집어삼켰다.
씻은 듯이 낫는다는 표현은 어찌 보면 어리석다. 아무리 몸과 마음을 열심히 씻어도 우리 마음 어느 한 구석엔 패턴(문양)이 남는다. (조직 검사 결과, 다행이지만 일단 제거를 하자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왜 계속해서 찌르르 찌르르한 느낌이 드는지, 또 어떨 때는 쥐어짜는 통증까지 생기는 건지 괜스레 불안해하는 요즘이다. 이젠 계속해서 이런 패턴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아프기 이전으로 돌아가지는 않더라."
친구와 최근의 건강 이력을 이야기하며 나눴던 문장이다. 이 문장을 곱씹다 봄보미는 문득 노랫말 하나를 떠올렸다. (낭만을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봄보미 안에 숨어든 낭만은 시도 때도 없이 노랫가락의 형태로 봄보미를 습격한다.)
I broke into a million pieces,
and I can't go back
(나는 백만 개의 조각들로 부서졌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어.)
노랫말처럼 완전한 복귀, 완벽한 일상 회복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직 음악이 있고 시가 있고 (어떤 상황에서건) 낭만도 있다.
But now I'm seeing all the beauty in the boken glass
The scars are part of me...
(그렇지만 지금 난 깨진 유리 조각 안에서 아름다움을 보고 있어. 그 흉터들은 나의 일부야.)
'고작' 석 달여, 정신없이 두려웠던 밤들의 시간. 그 시간이 여기 열 편의 글로 남았고 이제는 마지막 기적을 기다리는 중이다.
"조직 검사 주삿바늘이 요구르트 빨대였다면 맘모톰 주삿바늘은 콜라 빨대예요."
간호사분의 정중한 비유가 앞으로 올 나의 1박 2일 입원을 조금 더 으스스하게 만들고는 있지만,,
The scars are part of me...
내 일부가 되어 줄 그 빨대 구멍들, 그 안을 채워 줄 all the beauty int the boken glass...
바구니에 담듯 네 개의 혹들을 긁어모아 내다 버리는 그 시술을 받고 나면,
최대 열흘간 '절대 달리기 금지'에다가 '어깨 올리기 금지'에다가 '멀리 외출하기' 금지라고 한다. (집에서 꼼짝없이 뒹굴어야 할 판이다.)
그래도 염증에 대한 두려움이나 한 번 더 남은 최종 조직 검사가 끝나고 나면,
그러고 나면...
I broke into a million pieces, and I can't go back
예전의 안온하기만 했던 일상으로 돌아가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우리의 문양은 그 모서리 모서리마다 우리를 밝게, 혹은 어둡게 비추며 끝내 '낭만적으로' 반짝일 것이다.
당분간 달리기는 금지일 테니 봄보미, 조금씩 천천히, 세상을 다시 걷는 법부터 익혀야겠다.
(자, 산책을 하자.)
<에필로그>
달리는 대신 걷기에만 집중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계수나무에게 낭만을 습격당했다.
5월에 잎보다 꽃이 먼저 피며
10월에 열매가 익는다.
낙엽이 질 때 가장 달콤한 향이 난다.
낙엽이 질 때 가장 달콤한 향이 난다.
낙엽이 질 때 가장 달콤한 향이 난다.
낙엽이 질 때 가장 달콤한 향이 난다.
'계수나무 한 나무'조차 낙엽의 낭만을 안다는데 우리도 계수나무에게서 낭만 한 조각을 얻어, 비록 흉터는 남을지언정, 이 가을의 낭만을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봄보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랫동안 계수나무의 낭만을 중얼거렸다. 그 어떤 '나무 소개 글'보다도 낭만적인, 마치 시(詩)와도 같은, 계수나무의 달콤함을 떠올리면서.
'그래, 내 아픔은 시월의 열매로 익어 가는 중이고, 나도 언젠가 가장 달콤한 낙엽이 될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