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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not의 습격

by 봄책장봄먼지

#9_if not의 습격


if not...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래도 봄보미는, 자신의 건강이 if not일 경우, 그 경우의 수 안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혹은 하고 싶'을' 일들을 떠올렸다. (간신히 떠올려야 했다. 그간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은 나이나 세월과 함께 거꾸로만 자랐기 때문에 '목록'들이 줄어든 지 오래였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무엇? 일기장이었다. 또 한 번 종이를 펼쳤다


if not... 건강...


1. 지금 하는 일을 관둔다

2. 지금 하는 일을 관둔다. (엥? 이거 아까 1번에서 이미 말했던 이야기잖아?)

3. 지금 다니는 직장과 작별을 고한다. (저기요, 그러면 너 뭐 먹고살게? 게다가 1번부터 2번, 3번...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잖아요. 네? 뭐라고 말 좀 해 봐 봐요.)


뭐라고 말 좀 하라니 봄보미, 변명이라도 해야겠다. 봄보미는 적이 당황스러웠다. if not이면 이러겠다, 라는 브레인스토밍 중이었는데 단번에 같은 목록이 1번에서 3번을 채운다. 설마, 자신을 먹여 살려 주는 일인데 이렇게까지 싫어했다고? 고맙다고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봄보미는 당혹과 마주한다. 극단적인 if 앞에서야 자신의 마음이 가볍게 발가벗는다.


https://youtu.be/TzQQS6zw0Mk?si=TaHpMpxSAZKpa6ff

권위 있는 분들의 문장 속에서 들었던 바도 있고 해서 봄보미는 이런 사실을 익히 알고는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그냥 아무 옷이나 주워 입듯 살아가는 게 뭐 어때서? (라고 체념하고 산 지 이미 오래였다.) 다시 한번 봄보미, 1번부터 3번을 골똘히 쳐다본다.


인생의 옷이란 게 그렇다. 몸에 맞는 옷을 어떻게든 대강이라도 입는 것, 그게 인생의 옷을 입는 정답 같은 것 아니던가. 맞춤형 옷? 맞춤형 인생? 그건 돈 있고 시간 있고 여유 있는 자들의 전유물 같은 것 아니던가. 기성복 같은 인생에서 취향은 사치이거나 혹은 사람을 치사하게 만드는 인생의 교묘한 기술 같은 것. 봄보미는 그저 출신 대학, 출신 전공에 맞게 '그냥' 사는 것만도 벅찼다. 돈을, 아니 돈만 쥐어만 준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하고 살았고, 살아야 했다.)


사실 '기성복 인생'을 사 입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다음 날의 옷을 입을 수 있다? 그것도 감사하거나 감지덕지할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와서 갑자기 'if not'을 쓰고 보니, 무언가 잘못된 것만 같다.


좋아하는 것을 죽이고

하기 싫은 마음도 죽이고

해낼 수 없다는 두려움도 땅속에 억지로 파묻어 죽이고...


불현듯 봄보미는 깨닫는다. '이렇게 죽이기만 하다가는 내가 나를 죽이겠는걸?' 그동안 자신이 죽여 온 자신의 잔해들을 본다. 그 난도질된 흔적이 조직검사나 '진공 보조 유방종양 절제술' 같은 것으로 남아 버리는 걸까. 그래, 그만하자! "뭣이 중한디?" 한 번 사는 인생, 무엇이 그리 중하다고 이리 싫어하는 직업을 껴안고 사는가. 시술이든 수술이든 무엇을 받게 되든 어떤 'if'의 인생을 살게 되든, 자신의 몸을 위해서라도 마음을 죽이는 일만은 하지 말자... 라고 다짐하던 봄보미.. 제법 당찬 포즈와 굳센 결의로 일기장에 굵은 볼펜심을 꾹꾹 담아 누르던 봄보미... 그러던 봄보미의 그다음 날...


-결과 나왔어요. 지금 오실 수 있어요?

심장이 튀어나온다는 말, 사람들이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길, 심장이

봄보미를 앞질러 달린다. 따라잡으려니 숨이 차오른다. 겨우 심장을 추격해 붙잡아 도로 몸속으로 집어넣는다. 그제야 잠시 숨을 고른다. 도착한 대기실에서 봄보미는 초조해지는 마음과 부대끼고 겨루고 싸운다. 심장이 바깥에서 뛰고 있는 것만 같다. 쿵쿵쾅쾅. 이렇게 큰 심장 소리는 살며 처음 듣는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다 드디어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순간...


"다행히,,,,"

정말 슬로모션처럼 의사의 두 입술이 위아래로 아주 천천히 떨어진다. 심장은 여전히 무산소 100미터 달리기 중이다.


"다행히 나쁘지는 않아서.."

의사가 자신의 입술로 짓는 첫 단어, "다행'을 듣자마자 심장이 조금씩 달리기 속도를 늦춘다. 방망이질하던 장단이 천천히 평소의 심박수를 서서히 되찾기 시작한다.

'아, 일단... 사는구나...'

그다음 말은 잘 들리지도 않는다. 조금 전까지 난리를 치던 봄보미 심장이 바닥에 녹아내릴 듯 주저앉는다.

"그런데 이 혹들은요.."

의사는 할 말이 더 남은 눈치고 봄보미는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고만 싶은 눈치다. 그래, 일단 세상이 살려 주었다고 여기서 끝은 아니겠지. 제대로 살려면 더 해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근데 전에 제가 말씀드린 거 기억나세요? 조직 검사는 3개만 했지만 1개는 다른 1개랑 비슷한 유형의 혹이라 그때 3개만 검사했던 거였거든요. 맘모톰 시술로 제거해야 하는 건 실제로 네 개예요. 여기 여기, 그리고 또 여기 여기."

종이 위 동그라미가 세 개에서 네 개로 증식한다. (그리고 그 밖에 자잘한 혹들이 의사의 볼펜심이 흘러가는 대로 점박이 무늬로 곱게 곱게 피어난다.)


진료실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봄보마는 병원의 다른 구석으로 압송된다. 지금부터는 숫자 이야기다.

"그래서 입원비까지 합쳐서 총.."

으슥한 구석 상담실로 들어가 간호사와 의료비에 관한 토의를 한다. 그녀의 입술이 어떤 숫자를 말하려는 걸까. 총...?

"총 580만 원입니다."


저, 저기요. 오, 오백이요? 아니 거의 육백? 580이면 (이거 뭐) '반올림 천만 원'이 아닌가요?

"실손 없으세요?"

"보험이요? 없어요."

"네? 없다고요??!!!"

"(헉.) 그냥 안 들었는데..."

"어머, 어떡해. 실손 있어야 비용이 줄 텐데.. 어째요."

봄보미 자신보다 더 봄보미를 가여이 여기던 간호사분은 끝내 이런 시혜를 봄보미에게 베풀기로 결정한다.

"80은 빼 드릴게요. 500으로 맞춰 드릴게. (내 살려는 드릴게.)"

"가..감사합니다."

"다른 자잘한 혹들은 안 떼실 거죠? 의사 선생님이 말한 혹들 네 개만?"

"네...(다른 것들도 다 하면 정말 어느 집 전셋값 하나 나오는 거 아닌가요?)"


500도 당장 봄보미가 삼키기에는 덩치가 크다. 이 커다란 덩치를 어떻게 줄여 나가야 할까, 고민에 잠기는 봄보미다. 그간 봄보미는 'if not 이라면(만일 내가 건강하지 않다면)' 당장 이리저리한 방식으로 살아갈 거라고 자신의 미래에 번호를 매겨 가며 객기를 부렸다. (즉 자신을 '오늘만 사는' 사람으로 세팅하려 했다.) 1번, 지금 하는 일 안 해, 2번 현재 하는 일 안 할래, 3번, 이 직장을 떠나자... 봄보미가 매기던 번호들은 병원비라는 종잇장 위에서 순간, 짙은 허무에 휩싸인다. 이제 1번에서 3번까지의 항목은 끝났고 결국 4번의 번호를 매겨야 할 때가 왔다.


4. 그냥 (잔말 말고) 다니던 데 다닌다.


기성복이면 어떠랴, 옷이 좀 크면, 또 작으면 어떠랴. 이 인생이 나한테 안 맞으면 좀 어떠하랴. 내 안의 나를 좀 죽이면, 좀 더 죽여야 한다 해도 어떠하랴. 죽다 살아났다는데, 이제 이 혹들을 시술로 제거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보자는데 어떤 인생이면 어떠하랴.


봄보미의 볼펜은 if not 앞에 멈춰 서서 어느새 가운뎃줄을 만들며 1~3번을 벅벅 지운다.


1. 지금 하는 일을 관둔다 (응? 그러면 너 뭐 먹고살게? 이제 넌 누구 밑으로 들어가기에 너무 꽉 찬 나이야. 아니 넘쳐 버린 나이야.)

2. 지금 하는 일을 관둔다. (엥? 이거 아까 1번에서 이미 말했던 이야기잖아?)

3. 지금 다니는 직장과 작별을 고한다. (저기요, 이 사람 뭐 하는 사람? 아니 1번부터 2번, 3번...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잖아요. 네? 뭐라고 좀 말 좀 해 봐 봐요.)


봄보미의 내일에는 당분간 4번만 남는다.


4. 잔말 말고 다닌다.


때로는 잔말이 필요 없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If not라는 가정문은 없다. 현실적인 평서문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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