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이론
왜 어떤 사람은 사서 상처를 받는 걸까? 퍼주다가 실망하면서 말이다. 처음에는 진심이던 마음도 일방적으로 가닿다 보면 지친다. 위하는 행동이 피로가 될 때, 피로에 대한 대가를 받고 싶어진다. 한 만큼 알아주겠지, 한 만큼 돌아오겠지. 하지만 기대만큼 쉬이 반응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그러나 상대방의 반응은 이렇다. ‘누가 너한테 해달라고 했어?’ 그 말이 반박 불가 사실이어서 할 말도 없고 억울함만 배가된다. 피로하게 만든 건 나 자신이지 상대가 아니다. 우리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다가 장구를 찢는다.
내 친구 P는 반드시 회사에 가서 똥을 눈다. 똥을 누면서 돈을 받는다고 생각해야 위안이 된다고 한다. 월급이 많다면 그 시간에 더 열심히 일했을 거라고. 형평이론 equity theory에 따르면 사람들은 노력에 따르는 보상이 적절히 돌아오길 바란다. 노력만큼 보상이 돌아오지 않으면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빠지고, 보상과 노력 사이의 갭을 줄이기 위해 동기화된다. 주고받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은 관계를 통해 이득을 취한다. 내가 투자하는 만큼 적절한 이득이 돌아올 때 관계가 유지된다. 만약 잃기만 하는 관계라면 우리는 고민할 것이다. 이 관계를 지속하는 게 맞을까? 우리는 늘 저울질한다.
이런 메시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속물 취급당하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인간은 원래 계산적이다. 계산은 본능이다. 오늘 나의 배변 사정을 누구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겠지만, 화장실 가지 않은 사람은 없듯이 계산하는 마음은 들키기 싫은 진실이다. 관계에서 보상을 바란다는 사실에 거부감이 드는 건,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정하게 대해줬으니 가방 사줘, 즐겁게 해줬으니 신발 사줘, 마치 이런 느낌이다. 하지만 관계를 통해 얻는 건 물질적인 것이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왜 사랑할까? 설레기 때문이다. 친구는 왜 사귈까? 속을 털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를 통해 얻는 가장 큰 보상은 ‘마음’이다. 심리적인 보상 말이다.
힘들 때 도움받은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 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그렇다한들 상처받지 않았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 탓이고, 그래서 더더욱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해방 일지, 2022, 정지아, 창비, p.102>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죽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찾아온 손님들을 보며 아버지의 삶을 되돌아보는 딸의 이야기다. 빨치산이던 아버지에게 가족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그는 평생을 사회를 위해 살았다. 그러다 손해 입는 일도 태반이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희생하기를 쉬지 않았다. 딸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상처받고도 계속 도움을 주는 걸까?
보통의 사람은 도움의 대가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만족스러운 보상이 따르지 않기에 상처받는다. 그러나 소설 속 아버지는 다르다. 상대가 나의 노고를 잊든 말든, 배신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돕고 싶어서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사람이라 말할 순 없다. 아버지의 보상은 남들의 보상과 형태가 다를 뿐이다. 그에게는 희생하는 행동 자체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보상이었다. 관계에서 돌아오는 보상은 자기만족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베푸는 행위로 ‘내’가 뿌듯하고, 돕는 행위로 ‘내’가 즐겁다. 상대가 주지 않아도 내 안에서 보상이 나온다면 이것 역시 계산적인 행위다.
보상을 의외의 장면에서 마주하기도 한다. 바로 희생이다. 몇 해 전, 부모님에게 리마인드 웨딩 촬영을 선물했다. 그 과정과 결과에 만족할 줄 알았던 엄마는 못내 아쉬워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찍어드리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내가 리마인드 촬영할 돈을 아껴 부모님을 찍어드린 마음과 마찬가지였다. 진짜 사랑은 직접 경험할 때보다 상대가 얻는 기쁨을 볼 때 더 큰 만족을 주기도 한다. 물론 그것 역시 ‘내’ 만족이다.
짜장면이 싫다고 하신 어머니는 짜장면 먹는 아이를 보며 행복해한다. 이런 희생에 따르는 행복은 진짜다. 짜장면을 입에 넣었을 때보다 훨씬 큰 행복. 그러나 짜장면을 먹지 않는 어머니 때문에 철든 아이의 마음이 아프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이 희생은 누구를 위한 걸까? 희생은 결국 자기만족이다.
아이유의 미니 앨범 [love poem]에는 ‘인간의 이타성이란 그것마저도 이기적인 토대 위에 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정말이지 맞는 말이다. 우리가 섬기는 이유는 섬김을 통해 기쁜 마음 상태에 도달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이타적인 행위 역시 이득을 위한 것이다. 선한 행동마저 이기적이라니 인간미 없는 말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좌절할 이유가 없다. 나에게 보상인 일이 타인에게도 달콤하다면 그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인생은 비극적인 고전문학이 아니다. 반드시 누구 한 사람 죽는 결말로 끝낼 필요 없다. 내 기쁨이 상대에게도 기쁨이 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호의를 돌려받겠다는 기대는 우리를 힘겹게 한다. 베풂이 의도가 될 땐 스스로 괴롭고, 희생이 손해로 돌아올 땐 실망스럽다. 하지만 이타성마저 이기심 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조금 나아진다. 내 안에 만족감 그 자체를 보상으로 받는다면 마음을 달리 먹을 수 있다. 타인을 통해 채우려던 내 삶은 더 이상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된다. 새로운 계산기로 마음을 두드리자. 너에게도 나에게도 플러스가 되는 셈을. 그때 우리 삶은 셀 수 없이 풍요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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