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대신 외상 후 성장
신고은 작가입니다 :)
아래 본문은
심리학 교양서 일 년 열두 달의 심리「이달의 심리학」의 일부 발췌문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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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난 난닝구 차림으로 신문을 보는 아빠와 그 옆에서 파란 날개 선풍기에 입을 대고 아아아 소리를 내는 나. 목소리가 선풍기 바람에 깨져 아, 아, 아 하고 갈라진다. 더워서 베란다의 차가운 타일에 누우면 머리 위로 나무가 구름처럼 덮여 보였다. 초록이 되어버린 나뭇잎은 흔들흔들했고 그때마다 틈사이로 햇빛이 부서졌다. 여름 하면 떠오르는 소중한 장면.
쨍한 볕은 여름의 상징이다. 뜨겁다 못해 따갑다. 정신없이여름을 즐기고 돌아오면 볕이 피부를 벌겋게 익혔고, 며칠 지나면 피부가 벗겨졌다. 볕은 고통을 주지만 그런 볕을 미워할수만은 없다. 볕이 주는 선물이 놀라우니까. 여름의 볕은 세상을 싱그럽게 만든다.
식물은 온통 초록이 되어 무럭무럭 자란다. 겨우내 앙상했던 가지를 놀랍게 부풀리고, 황무지였던 공원을 무릎까지 올라오는 수풀로 가득 차게 바꾼다. 죽은 듯 보이더니 새 생명을 얻고 울창해진 식물들. 고작 볕을 받았을 뿐인데, 어쩜 그렇게 무럭무럭 자랐을까. 뜨겁고 힘들지 않았을까. 식물과 그들이 받는 볕을 보고 내 삶에 내리쬐는 고통을 떠올린다.
라디오에 출연하게 되었다. 드라마와 영화 속 인물을 심리학으로 분석하는 코너였다. 호기로운 도전과 달리 곧 시련이 닥쳤다. 말로만 듣던 악플러 입장. 방송이 시작되자 채팅창에 악플러 한 명이 도배를 시작했다. 거든요? 거든요? 거든요? 나에게는 나도 모르는 습관이 있었다. 거든요, 로 말을 끝내는 습관. 누군가 그 말투를 계속 따라하며 비아냥거렸다. 반복되는 악플을 받으며 점점 위축되었다. 스튜디오 앞에 서면 오스스 소름이 돋고, 머리가 하얘졌다. 방송이 시작되고 나도 모르게 거든요를 말해버리면 말문이 막혔다.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 기억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시련이 찾아올 때 어떻게 대처하나요? 첫 직장 면접 때 받은 질문이었다. 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찌질한 영웅이 나오는 영화를 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는 〈트랜스포머〉의 샘이다. 〈트랜스포머〉는 지구를 침공하려는 디셉티콘과 그것을 막으려는 오토봇, 두 로봇 세력의 전쟁을 다룬 영화다. 이때 샘은 우연히 친구가 된 오토봇의 로봇 범블비를 돕는 주인공이다. 샘은 어리바리하고 숫기도 없다. 몇 번이나 도망갈까 고민도 한다. 하지만 마침내 해내고 만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있는데, 디셉티콘이 샘을 따라오려 할 때 샘이 스스로에게 되뇌는 장면이다. 이들이 계속 나를 따라온다는 건, 나에게 해낼 힘이 있다는 뜻이야.
나는 악플러의 집요한 괴롭힘에 오랜 시간 우울을 떨치지 못했다. 방송과 맞지 않는다는 좌절은 점점 자라서 말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극단적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맞아, 나는 샘이었지. 나는 시련이 찾아올 때마다 그랬듯 되뇌었다. 이런 일이 찾아온다는 건 나에게 해낼 힘이 있어서야. 찌질해 보여도 내가 주인공이야. 주인공에게는 원래 시련이 찾아와 성장 기회가 되는 법이야.
방송 모니터링을 하며 악플러의 말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부터 시작했다. 말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말은 생각보다 빠르거나 느렸고, 톤은 너무 높거나 때로는 낮았다. 너무 지루하거나 들떠 있기도 했다. 그날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대신 솔직한 평가를 부탁했고, 강의를 촬영해서 매일 되감아봤다. 말투를 고치기 위해 몇 번이고 리허설을 했다. 그리고 몇 달 뒤 강의평가에서 만난 반가운 메시지. 강사님 말투 좋아요. 라디오 듣는 것처럼 행복했어요.
수년간 샘의 대사를 되뇌며 시련을 기회로 삼아오던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영화 〈트랜스포머〉에 그런 대사가 나오는 장면이 없던 것이다. 영화를 다시 보면서 만난 샘은 그저 시종일관 불안한 소년 자체였다. 그럼 내 마음에 각인된 그 메시지는 뭘까? 어쩌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닮은 샘에게, 아니 샘을 닮은 나에게 건넨 내면의 목소리 아니었을까? 용기를 주는 메시지는 언제나 자기 안에 있다.
얼마 전 엄마가 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어린 시절 내내 다투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부모가 다툴 때마다 마음에 흠집이 났는데, 그건 엄마가 아빠에게 하는 말 때문이었다. 엄마는 아이를 낳은 게 후회된다 했다. 아이만 없었어도 당신과 당장 이혼했을 거라고. 친구는 늘 자신이 태어나서 부모가 불행하다고 자책하며 살아왔다.
많은 사람이 이런 상처를 받는다. 그 상처를 품고 살아간다. 자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며 결혼도 거부하고, 좋은 부모가 될 자신이 없다며 자녀를 낳지 않는다. 그러나 친구는 달랐다. 친구는 상처를 간직하는 대신 이렇게 다짐했다. 내 아이에게는 절대 상처 주지 않겠다고, 나는 부모와 달리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래서 친구는 아이에게 매일 말해준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어떤 상처는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같은 일이 또 일어날 거란 불안을 싹틔우며 트라우마를 자라게 한다. 트라우마는 내일로 걸어 나가는 문고리를 걸어 잠근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에 빠지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고통을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아픔을 통해 의미를 찾고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며 더 나은 행동을 배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이라는 현상이다.24 외상 후 성장은 단순히 트라우마를 회복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외상을 통해 이득을 얻는다. 몰랐던 장점을 발견하고, 강점을 더 키워 인생에 새로운 희망을 그린다.
말미잘에 숨어 사는 귀여운 물고기가 있다. 니모로 알려진 흰동가리다. 흰동가리는 말미잘 깊숙이 새끼들을 숨기고 보호를 받는다. 이런 고마운 말미잘을 위해 언제나 주변을 청소하는데, 가끔 시련이 찾아온다. 화산암 조각이 해류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화산암은 양이 너무 많아 아무리 치워도 주변을 뿌옇게 만든다. 초보 아빠 흰동가리는 엄청난 시련이 닥친 듯 당황하는데 그 모습이 제법 귀엽다. 사실 자연의 섭리를 볼 때 이 일은 희소식이다. 곧 쏟아진 부석이 영양분을 방출하고 이 영양분이 새끼와 환경을 살릴 것이다. TV를 보면서 말해준다. 걱정 마, 차라리 잘된 일이야! 귀여운 니모야.
우리는 초보 아빠 니모를 닮았다. 나쁜 일이 쏟아져 들어오면 망연자실에 빠진다. 트라우마는 모든 걸 무너뜨리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깨닫게 된다. 트라우마가 자양분이 되는 자연의 섭리도 있다는 것을. 고통은 시야를 새롭게 열고, 보이지 않던 가능성을 보여준다. 뙤약볕 아래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듯 고통 아래 우리는 단단하게 자란다.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면 나는 얼마를 주고서라도 결제할 것이다. 그러나 여름볕을 완전히 피할 수 없듯 따가운 일은 이따금 찾아온다. 고통이 찾아올 때 스스로에게 묻자. 이 어려움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용기 가득한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한 걸음 더 나아가자.
게임하다 적이 자꾸 나타나면 바른 길로 가고 있는 거라는 말을 좋아한다. 당신의 삶에 뜨거운 고난이 찾아온다면 안심하길. 잘 가고 있다는 증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