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의 강의: 감정에도 이름이 필요하다
『잘하고 싶어서 자꾸만 애썼던 너에게 』가
새로운 문장과 제목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가라앉는 게 아니라 깊어지는 거야 』의 한 챕터를 공유합니다
1년간 심리 상담을 받았다. 과거의 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선생님은 물었다. “그때 기분이 어땠어?” 나는 대답했다. “슬펐…겠죠?”, “우울했…겠죠?” 선생님은 다시 물었다. “…겠죠? 왜 네 감정인데 추측을 하니?” 왜냐니, 모르겠으니까 그렇지. 그렇다. 나는 감정을 배제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왜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마치 여름날의 모기처럼 말이다. 그러나 모기에게도 존재 이유가 있다고 한다. 세상에 모기가 사라지면, 모기를 피해 삶의 터전을 옮기던 야생동물들이 그 자리에 머문다. 야생동물들이 한곳에 자리를 잡으면 식물들이 자라지 못한다. 종국에는 생태계가 파괴된다. 우리에게 불편하다고 해서 세상에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수많은 감정이 존재한다. 행복,즐거움, 기쁨과 같이 늘 내 안에 있길 바라는 감정도 있지만, 우리를 힘겹게 만드는 감정도 있다. 때로 그 감정을 왜 느껴야 하는지 의아하기도 하다. 그러나 불편한 감정이라고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양한 감정이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만 한다면 우리 마음의 생태계는 더 건강해진다. 왜 존재하느냐 묻고 싶던 감정의 존재 이유를 살펴보자.
두려움과 불안
스트레스를 받고 가장 먼저 나타나는 반응은 감정의 변화다.
그중 대표적인 감정이 바로 두려움fear을 느끼는 것이다. 두려움은 사람이나 상황이 나에게 위해를 가한다고 판단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수풀 사이로 뱀이 기어 나오거나, 날카로운 칼이 날 향할 때처럼 말이다. 물리적 위협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물리적 위협보다 두려운 것은 심리적 위협이다. 뱀이 나오면 뛰어가면 되고, 칼이 날아오면 막을 수 있다(물론 기술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심리적 위협은 대처가 어렵다. 이길 수 없는 부모가 모진 말을 쏟아낼 때, 늦은 밤 문득 떠오른 귀신 생각이 떠나지 않을 때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두려움은 배가된다. 두려움은 정말 불필요해 보인다.
편도체는 두려움과 같은 기본 정서에 관여하는 영역이다. 편도체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공포를 느낄 수 없다. 실제로 미국의 조디 스미스라는 한 남성은 26세에 뇌전증 진단을 받고 강렬한 불안과 공포를 이기지 못해 편도체 제거 수술을 받았다.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더 이상 공포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하루는 스미스가 뉴저지 주의 거리를 걷다가 다섯 명의 강도를 만났다.머리로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뒷걸음질 치지도 않았고, 오히려 덤덤히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그의 태도에 강도들이 오히려 당황했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어떻게 될까? 언제나 이번같이 운이 좋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는 건 위협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의미와도 같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괴한이 날뛰는 모습을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가 자신에게까지 화가 미치는 것을 허용한다. 두려움은 우리를 경계하고 각성시켜 준비 태세를 갖추게 하고 대처 방안을 마련하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하지만 극도의 스트레스는 두려움과 닮은 불안anxiety을 유발한다. 불안은 두려움과 달리 실체가 없는 대상에 느끼는 공포심이다. 불안의 대상은 미래에 있다. 시험을 망쳐 당장에 종아리를 맞게 생겼다면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 결과로 취업에 실패해 인생이 불행해질 거라 믿는다면 불안이 찾아온다. 아직 오지 않은,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것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불안이다.
불안은 우리를 긴장시키는 부정적 정서다. 그 외의 기능은 없다. 나다운 모습을 방해하고 높아진 긴장감으로 필요 이상의 실패를 유도한다. 부정적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잠재력을 발휘하는 길이 막힌다. 불안하지 않았으면 오지 않았을 최악의 미래에 한 걸음 가까이 나아가게 해 오히려 나를 피하고 싶은 상황으로 인도한다.
불안감이 찾아올 때엔 빠르게 벗어나는 것이 좋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나에게 묻는 것이다. ‘증거 있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 없어?’ 하고 말이다. 불안에 대한 상상은 대부분 망상이다. 불안은 실체가 없고 대부분 과장되어 있다.
만약 그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면 막연한 불안을 명확한 두려움으로 대체해야 한다. 평생 가난하게 살 거라는 불안은, 당장 취업을 위해 무얼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꾸면 된다. 두려움에는 해결 방안이 있다. 불안의 대상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치환되면 어떻게 대처하고 나를 보호해야 할지 구체적 방안을 찾을 수 있다.
슬픔과 우울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때, 간절한 바람이 좌절될 때, 슬픔sad이 찾아온다. 슬픈 우리는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슬픔 그 자체는 아름다운 감정이다. 슬픔이야말로 슬픔을 극복하게 만드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다섯 가지 정서가 캐릭터화되어 등장한다. 그중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녀석이 바로 슬픔이다. 슬픔이가 하는 일은 슬픈 것이다. 계속 슬프다. 슬픔이가 등장하면 정서의 주인 라일리는 울고 또 울고 또 운다. 슬픔이는 라일리가 자꾸 까라지도록 만든다. 그래서 다른 캐릭터들은 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슬픔이에게 이 안에서 나오지 말라고 한다. 아무 것도 건드리지 말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그런데도 슬픔이는 자꾸 나온다. 나와서 기억을 파랗게 물들이고 감정선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영화의 끝자락에서 슬픔이는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갑작스러운 이사로 그리움에 빠진 라일리가 펑펑 울 시간을 허락한 것이다. 충분히 슬퍼한 라일리의 마음에 파란 기운이 걷혀 나간다. 그러자 잊고 있던 다정한 추억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슬픔에 가려졌던 소중한 마음이 되살아난 것이다. “슬퍼하지 마.” 이 말을 참 많이 듣고 살아왔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견뎌 내라고. 슬퍼도 울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감정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슬픔은 언젠가 끝난다. 물론 전제는 있다. 슬플 때는 최선을 다해 슬퍼해야 한다. 그러면 슬픔이 떠나간다. 하지만 슬퍼하지 않으려 노력할 때, 슬픔은 더 오래 머물며 나를 괴롭힌다. 나를 슬프게 한 사실은 변함없으므로 감정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 장면을 계속 되감게 된다. 반추rumination라는 현상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지? 왜 그때 그렇게 행동했지?” 답도 없고 해결도 안 될 과거에 발목이 잡혀 되감고, 되감고, 또 되감다 보면 억압된 슬픔이 진해진다. 그렇게 농축된 슬픔이 우울depression이다.
우울의 주된 역할은 활력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부정적 기억을 끊임없이 반추해 그 상태를 지속하게 만든다. 실패를 되새기며 역시 나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또한 우울은 사람들을 밀어내는 신호를 보낸다. 슬픈 사람은 위로하고 싶지만 우울한 사람 곁에는 머물고 싶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다. 위로와 공감, 지지가 필요한 상황에서 사회적 지원을 받을 기회를 사라지게 하니 회복의 가능성도 줄어든다. 그러니 우울에 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슬퍼해야 한다. 슬픔은 슬픔으로 사라지지만 우울은 우울에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슬퍼하자. 그렇게 다시 회복할 힘을 얻자.
분노
갑자기 약속이 펑크날 때, 계획이 틀어질 때, 소중한 것을 빼앗길 때, 통제권을 잃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 우리는 분노anger한다. 분노는 장애물을 만날 때 느끼는 부정적 감정이다. 사람들은 화내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지만, 분노는 매우 중요한 정서다. 부당한 대우로부터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분노는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에너지다.
하지만 분노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펜싱선수의 꿈을 안은 희도에게 절망이 찾아온다. 바로 IMF가 터진 것이다. 희도의 학교에서는 펜싱부를 없애버리고, 펜싱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희도는 펜싱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 보내달라고 엄마에게 간청한다. 그러나 엄마는 희도를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잘되었다며 소질 없는 펜싱을 그만두라고 한다.
바로 그 순간, 쨍그랑! 밖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난다. 신문 배달부 이진이 던진 신문에 희도네 집 정원에 있던 오줌싸개 동상이 타격을 입은 것이다. 신문은 공교롭게도 소년의 중요 부위를 강타하고, 소년은 더 이상 오줌을 눌 수 없게 된다. 화가 난 희도는 이진에게 소리를 지른다. 누구에게나 오줌 눌 권리는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말이다. 당황한 이진은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러자 희도는 이렇게 소리친다. “모르지, 난 그냥 화를 내고 싶었어. 화가 나니까!”
사람들은 좌절 상황을 맞닥뜨리면 공격적으로 변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주장하는 좌절-공격 가설frustrationaggression hypothesis이다. 꿈이 좌절된 희도는 공격성이 증가했다. 그리고 오로지 화를 내는 것이 목적이 되어 화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분노의 방향은 엉뚱한 곳을 향했다. 희도를 화나게 한 건 이진이 아닌 엄마였는데 말이다.
분노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 하지만 이 에너지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애먼 사람이 상처를 받고, 분노가 또 다른 분노를 낳는다. 결국 나의 스트레스가 또 다른 사람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낸다.
분노는 불과 같아서 유용하다. 그러나 불과 같아서 위험하다. 나의 분노는 타인을 아프게 할 명분이 될 수 없다. 분노를 어떻게 써먹어야 할까? 우리가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다.
신고은 작가의 감정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는
다양한 감정의 종류와 기능,
건강하게 감정을 다루는 법에 대해 배웁니다.
글쓰기를 통한 치유 워크숍도 진행합니다.
강연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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