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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머무는 저녁

여름의 연애

by 오설자


산책 길 초저녁 편안함이 대지를 덮는다. 쫓아오며 찌르던 한낮의 햇살이 가라앉고 부드러운 공기가 내리는 저녁 이 시간을 좋아한다.


분수대 높은 물줄기가 경쾌한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덩달아 몸이 출렁거린다. 아이들이 물줄기 따라 분수대 주변을 뛰어다닌다. 높이 솟았다 내려오는 물기둥이 물안개가 되어 뺨에 닿는다.


늘 가는 산책길로 올라선다. 잔디밭에 음식을 펼쳐놓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주변으로 안온한 노을빛이 내려앉아 있다.

문득 눈이 머무는 곳. 한 앳된 청년이 강이 바라보이는 잔디밭에 캠핑 손수레에 싣고 온 물건을 꺼내 세팅하고 있다. 신중한 손놀림으로 의자를 옮기고 물건을 하나씩 배치한다. 꽃다발이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달콤한 사연이 있는 것만 같아 발을 멈춘다.

탁자를 조립하여 세워 손으로 쓱 쓸어보고

판판한 탁자 위에 커피 두 잔과

흰 종이로 싼 장미꽃을 올려놓는다.

신중한 결정이라도 하듯

손가락을 입에 대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커피잔을 나란히 붙여놓고

꽃다발을 오른쪽에 놓았다가 왼쪽으로 놓았다가

다시 앞쪽으로 돌려

꽃송이가 ‘의자의 주인공’과 마주 보게 놓는다.


나란한 의자를 바싹 당겨 붙이고 앉아 빈 의자 쪽으로 고개를 기울인다. 미래에 도착할 누군가에게 얼마만큼의 거리가 적당한지 가늠하는 것일까. 사랑에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지. 너무 가까우면 질척이고 너무 떨어지면 서운할 터이니. 조금의 거리. 모든 것에 필요한 거리. 잘 마른 장작도 조금 떨어트려 공간을 만들어야 연기 내지 않고 잘 탄다고 하잖는가.


환영 세트장을 만들고 모든 준비가 끝난 그는 의자 깊숙이 기대 주인공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누군가를 향한 애정 어린 마음이 멀리 있는 내게까지 퍼진다. 그가 맞이할 설렘의 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나뭇잎도 소리 없이 사랑스러운 순간을 함께 기다린다.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드는 듯한 그 일련의 과정을 멈추어 지켜보던 나를 세월에 다 지워진 연애할 때로 데려가 촉촉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된 것들이 눈부신 빛을 드리우고 마음을 흔들어 놓던 날들. 그의 냄새는 다르게 느껴지고 그가 좋아하는 노래만 들어도 가슴은 울렁거렸다. 그와 함께 먹었던 음식은 그 순간으로 돌려놓고 연애편지를 쓰느라 들뜬 얼굴로 온밤을 지새우곤 했다.


숲길로 들어서니 향긋한 냄새가 풍겨 나온다. 희고 노란 인동꽃 무리가 피어 있다. 어릴 때 하듯 하나를 따서 꽃받침을 톡 씹어 잘라내고 혀에 대어 본다. 달착지근한 맛이 입안에 퍼지고 괜스레 흥얼거린다.


안동꽃과 갈퀴나물


다른 곳으로 가야 하지만 일부러 왔던 길로 돌아온다. ‘주인공’은 왔을까. 발길이 빨라진다. 아! 그곳에 특별한 노을이 떠 있다. 은은한 주홍색 옷을 입은 여자 앞에 장미꽃이 붉다. 깊은 의자 속으로 앉은 그들의 뒷모습에 마음이 놓인다.


고백은 했을까. 조심스러운 손길과 정성 어린 준비에 합당한 대답이 돌아왔길. 다정한 눈빛과 두근거리는 마음이 곁으로 건너가는 순간이었기를. 때때로 서로에게 향하는 마음이 무디어질 때마다, 강물에 부서지는 노을 속에서 고백을 하고 고백을 받던 그 떨리던 순간을 돌아보길. 하긴 괜한 걱정일지도 모른다.

여름의 연애는 오래가는 법이니까.


사랑이 머무는 참 좋은 저녁.

어스름 속에 앉은 그들 위로 어디서 날아온 은은한 인동꽃 향기가 날아가 앉는다.


(2025. 시 see,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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