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10(토)
그렇게 늦게 자지도 않은 데다가 아무런 방해 없이 9시가 다 되도록 자니 확실히 푹 잔 느낌이기는 했다. 수면의 양 보다는 질이라는데 오늘은 양과 질을 모두 챙겼으니 그야말로 꿀잠이었다.
소윤이 외숙모가 출국하기 전(소윤이 외삼촌, 외숙모는 현재 세계일주 중이다) 유산으로 넘겨준 것 중에 소대창이 있었다. 냉동실에 얼려 놨었는데 아내는 종을 불문하고 동물의 내장 쪽에는 아예 관심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기피 증상이 있어서 한참을 꺼내지 못했었다. 아내가 없는 어젯밤 나 홀로 야식 메뉴로 선정했다. 양념 안 된 것 한 봉지, 양념된 것 한 봉지. 이렇게 두 봉지가 있었다. 막상 구워 놓으니까 자그마한 접시 하나에 다 담길 정도로 양이 많지는 않았다. 맛은 기가 막혔다. 이런 걸 엄청 좋아하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거의 먹어 본 적이 없으니, 오랜 공백이 주는 반가움인지 아니면 진짜 그 자체로 맛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맛있었다. 대가도 컸다. 구울 때 기름이 엄청 많이 나오길래 그냥
'기름기가 장난 아니네'
라고 생각만 하고 프라이팬은 레인지 위에 그대로 올려 두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 부지런히 집을 치워놓고 나서 설거지를 하려고 싱크대 앞에 섰는데 거대한 기름을 품은 프라이팬 두 개가 참 골칫덩이였다. 굳은 기름을 녹이기 위해 끓인 물을 부은 것 까지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아내가 말하길, 그럴 때는 차라리 다시 불을 켜고 기름을 녹여서 일반쓰레기로 버리는 게 낫단다) 여기서부터 조금 더 신중했어야 한다. 다른 설거지를 모두 마친 뒤 조심스럽게 기름을 처리하고 따로 닦든가 했어야 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설거지 거리들이 널려 있는 싱크대에 기름 녹인 물을 붓고 프라이팬을 열심히 닦기 시작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온 싱크대에 기름 범벅이 되고 물이 빠져나가는 개수대 안에도 기름이 잔뜩 끼고. 다른 설거지 거리에도 기름 파티. 아무튼 소 대창 한 번 맛있게 먹었다가 그야말로 생고생을 했다. 덕분에 마음먹었던 화장실 청소도 하지 못했다.
1시쯤 처갓댁에 가서 장인어른과 함께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다. 장모님은 결혼식이 있으셔서 거기 가시고. 그놈의 소 대창 때문에 영양가 없이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고 12시가 조금 넘었을 때 집에서 나왔다.
"여보. 나 아울렛 들렀다 가도 되나?"
"지금? 좀 빨리 나오지"
"집 치우느라 그랬지. 너무 늦겠지?"
"아냐. 들렀다 와도 돼. 너무 늦지는 말고"
전부터 축구화를 하나 사고 싶었는데 아프리카의 먹지 못하는 아이들처럼 불쌍하게 말라가는 지갑을 보며 간신히 참고 있었다. 그러다 폭발했다. 축구화를 향한 욕망이. 그 길로 아울렛에 들러서 축구화를 하나 질러 버렸다. 물론 아주 저렴한 보급형 모델로. 그러느라 시간이 꽤 늦어졌고 두시가 다 돼서 처갓댁에 도착했다.
하루 못 봤다고 소윤이가 유난히 더 반갑게 날 맞아줬다. 서둘러 짐을 챙기고 애들을 태워서 식당으로 움직였다. 장인어른은 볼 일 보러 나가셨다가 식당으로 바로 오셨다. 어제 10시가 넘어서 잤고 오늘은 6시가 조금 넘어서 일어난 소윤이는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차에 타자마자 잠들었다. 시윤이는 누나보다 더 늦게 잤으면서 일어난 건 비슷하게 일어났고 아내가 오전에 낮잠을 재웠다. 재우긴 했는데 무려 1시간 20분이나 걸렸다고 한다. 고생 시킨 게 미안했는지 밥 먹으러 가려고 차에 태울 때, 그때까지 푹 자고 있었다.
엄청 오랜만에 잠든 소윤이가 앉아 있는 카시트를 통째로 들고 식당에 들어갔다. 언제나 그렇듯 밀려오는 창피함과 힘겨움. 그래도 한 명이라도 재워 놓으면 찾아오는 평화로움이 느껴질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 시윤이는 나름 열심히 먹느라 조용했다. 소윤이도 밥을 먹이긴 해야 할 것 같아서 나중에 깨웠는데 너무 피곤했는지 도무지 일어나지를 못했다. 눈을 떴다가도 금방 다시 감고 아무리 말을 걸어도 비몽사몽이었다.
지나고 보니 굉장히 이색적인 풍경이었네. 자는 소윤이를 내가 일부러 깨웠는데 또 그걸 마다하고 계속 자겠다는 소윤이. 생소하다. 소윤이는 밥 다 먹고 다시 차에 태워 카페에 갈 때까지도 깨지 않았다. 카페에 도착해서야 정신을 차렸다.
밥 못 먹은 소윤이를 위해 케잌 두 개랑 미숫가루를 시켜줬다. 소윤이는 미숫가루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엄청 달기는 했지만 어차피 밥이 아니라면 다른 것보다는 좀 더 배도 채우고 덜 해롭지 않나 싶었다. 시윤이가 밖에 나가겠다고 하자 장모님이 시윤이를 데리고 나갔고. 그걸 본 소윤이는 자기도 나가겠다며 장모님을 따라 나갔고. 그걸 본 장인어른은 소윤이를 따라나섰고.
카페에는 아내와 나만 남았다.
"우리 둘이 데이트네?"
뻔뻔스럽고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마 소윤이, 시윤이의 조부모님들을 만나면 아내와 나의 엉덩이에서 아주 점성이 강한 어떤 점액질이 나오나 보다. 도무지 엉덩이가 떼어지지 않는다. 우리만 호사를 누렸다. 저녁에는 같이 홈스쿨 하기로 한 집에 가서 함께 부모교육 동영상을 보는 일정이 있었다. 카페에서 나와 장인어른, 장모님과 헤어지고 시안이네 집으로 갔다.
어른들은 동영상을 봐야 하고 애들 네 명은 알아서 놀아야 했는데 작은 분쟁과 마찰을 중재해야 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뭐 나름 애들끼리 잘 놀기는 했는데 나중에 보니 집이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어른들의 관심이 조금 희미해진 틈을 타 온갖 장난감을 다 꺼내서 거실에 쏟아 놓고 신난다고 좋아했다. 차라리 우리 집이면 그냥 속 편하게 다 가고 나서 치우면 되는데. 매번 손님으로 가서 몸만 쏙 빠져나오기도 미안했다. 다행히 오늘은 분위기가 잘 만들어져서 애들과 함께 어느 정도는 정리를 했다. 점심이 늦기도 했고 워낙 맛있게, 많이 먹어서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는데. 막상 또 저녁상이 차려지니 술술 잘 들어가긴 했다. 내 머리가 위장처럼 열심히 일 했으면 내가 지금 뭐라도 하고 있었을 텐데.
요즘 깊은 고민이 하나 있다.
소윤이가 시윤이한테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친구나 동생을 만나서 놀 때도 자꾸 호통을 치고 꾸지람을 한다.
"어허. 강시유우우운. 누가아아아아. 안돼에에에에에"
"아니야아. 너어어어. 한번만 더 그러며어언. 혼날 줄 알아아아아아"
"시안아아아. 하지마아아아.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아아아. 아니에여어어어어. 하지 않아여어어어"
자기가 당한(?) 그대로 뱉어내고 있다. 가뜩이나 성대모사력이 뛰어난데 마치 자기가 집에서 어떻게 혼나는지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똑같이 나의 말투와 억양, 단어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부끄럽기도 하고 또 소윤이한테 맞지 않는 말, 행동이기도 하고. 아무리 일기에다 좋은 아빠인 척하고 만나면 착한 아빠인 척 해도 가장 은밀한 우리 집 안에서는 있는 모습 없는 모습 다 아이들한테 보여주기 마련인데, 그걸 그대로 우리 애가 따라 하니 그 기분이 참 묘하고 영 찝찝하다. 조만간 소윤이한테도 솔직하게 얘기하고 (아빠가 화내고 언성 높이는 건 잘못했다고) 소윤이도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잘 말해줘야겠다. 물론 내 행동의 개선이 최우선이겠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소윤이가 ABC 노래를 불러달라길래 열심히 불러줬다. 그리고 아내가 물었다.
"소윤아. 소윤이는 영어 같은 게 재미있어?"
"어. 난 영어 재밌어"
"그래. 엄마랑 집에서 같이 배우고 그러자"
"엄마. 엄마는 말은 많이 하는데 행동은 안 해"
"왜?"
"아니. 맨날 하자고 하는데 한 번도 안 하잖아"
"그랬어? 이제 진짜 노래도 듣고 동영상도 보고 그러자"
기억이 흐려져 정확한 워딩은 아닐 수도 있지만 [말, 행동]이라는 단어를 써서 언행불일치를 분명히 지적했다. 무서운 녀석. 소윤이한테는 진짜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해야 한다. 소윤아, 아빠가 아예는 아니고 어쩌다 한 번씩은 화도 내고 소리 지를 수는 있는데 최대한 안 그러도록 노력해 볼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