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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Jun 14. 2023

딸에게 쓰는 편지 84; 김빠진 콜라의 뒤늦은 사과



멋진 스포츠카를 타고 강변을 달렸어. 뚜껑을 열어서 바람도 시원했지. 일행은 네 명. 아빠와 친구, 그리고 친구의 여사친과 그 여자의 친구. 아빠는 그 여자들과 그날 처음 본 거였고.     


“김빠진 콜라 같아요.”    


짧은 드라이브를 마치고 수종사라는 절에 차를 마시러 걸어가고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아빠의 데이트 상대가 된 여자가 갑자기 한 말이야. 처음 본 여자가 처음 본 남자에게.     


김빠진 콜라라...

앙꼬 없는 찐빵, 불어버린 라면, 인터넷 안 되는 핸드폰,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 유효기한 넘겨버린 복권. 뭐, 대충 그런 뜻이었겠지? 활기도 없고, 매력도 없고, 존재 이유도 없는, 이미 폐기되었어야 할 존재...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욕이고 저주의 말이 분명한데, 막상 그 때는 별 생각이 없었어. ‘넌 그렇게 생각하냐? 세상에 불만이 많구나.’ 그런 정도로 가볍게 넘어갔던 것 같아. 굳이 변명을 하자면 당시 내 상황이 힘들고 어려워서 처음 만난 여자의 투정을 들어줄 여유가 없기도 했고.     


그런데 갑자기, 오늘 아침에 산에서 내려오는데 그 생각이 나는 거야. 정말 뜬금없이 맥락 없이 떠오른 기억.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     


‘아! 그 말이 맞구나!‘     

어떤 깨달음 같은 거라고 할까? 분명히 그 사람이 퍼부을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비난인데 그게 나에 대한 비난으로 느껴지지 않았어. 정확하게 나의 정체를 말해준 거라고 생각됐지.     

‘그래, 맞아. 나는 콜라 같은 사람이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아빠는 콜라를 좋아하지 않아. 심지어 피자 먹을 때도 콜라는 마시지 않잖아? 나는 콜라의 탁 쏘는 맛을, 탄산수의 자극을 싫어한단 말이야.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의 단 맛은 좋아하지만, 달고 톡 쏘는 음료는 싫어. 그래서 커피 말고는 생수만, 삼다수만 마시잖아.     


‘나는 물이야. 물 같은 사람이야.’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지. 콜라는 마셔야 ‘시원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을 마셔야 갈증이 가시는 사람도 있어. 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콜라의 쏘는 맛이 없다고 말하는 건 맞지 않지. 내게 잘못이 있다면, 콜라 맛을 원하는 사람의 옆에 그때 그 시간에 물처럼 있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는 거지. 그 사람은 콜라가 좋아서 콜라를 원했고, 나는 나대로 물처럼 행동하고 있었던 거니까.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영화도 있지만, 지금도 맞고 그 때도 맞았던 거야. 세상에 틀린, 잘못된 것은 없다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니지.   

 

개구리가 강을 건너려는데 헤엄을 못 치는 전갈이 자신을 등에 태워 같이 건너자고 부탁해.

개구리가 말하지.  "널 어떻게 믿어 넌 전갈이잖아. 독침으로 나를 찌를 수 있어."

전갈이 대답해. "날 믿어.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럼 우리 둘 다 죽을 텐데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

개구리는 전갈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해. 전갈을 등에 태우고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지. 곧 강을 건너 서로 갈 길을 가면 끝!     


그런데 강 한가운데 다다랐을 즈음 물살이 거세지자 전갈이 갑자기 개구리를 찔러. 개구리는 옆구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전갈이 자신을 물었음을 알아차리지.

원망 어린 눈으로 전갈을 바라보며 개구리가 소릴 질러. "도대체 왜 그랬어?"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전갈이 개구리에게 하는 마지막 한마디.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찌르는 게 내 본성이야."  

  

프랑스 작가 장 드 라퐁텐이 쓴 우화라고 하는데, 어쩌겠어? 그날 아빠가 처음 만났던 그 여자는 콜라였고, 아빠는 물이었으니...     

하지만, 만약 지금 다시 그 여자를 만난다면, 그래서 다시 그 말을 듣는다면, 아빠는 이렇게 말할 거야. 전갈이 개구리에게 하듯이 진심으로 미안해하면서,     

“미안해요. 나도 어쩔 수 없네요. 물 같은 게 내 본성이라.”     

사랑하는 딸!

네가 콜라건 물이건, 개구리건 전갈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너답게 사는 것! 저의 본성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감추지 않고 당당하게,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것!

요즘 기말고사라 고생이 많은데 힘내! 아빠가 항상 응원하는 거 잊지 말고!     

   ---딸이 본성대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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