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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필리아노 Sep 23. 2021

아버지의 선물

가을을 타다 : 추억의 자전거

가을로 떠나는 차에 올라타고 있는 동안 추석도 함께 했습니다. 추석 연휴를 집에서 보내다 보니 또 머나먼 추억 속으로 빠져 들게 됩니다.


벌써 20년이나 지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지만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신 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버렸습니다. 이 번 추석부터 시골이 아니라 제가 사는 곳에서 모시게 되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조금 더 떠 올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아버지의 커다란 자전거로 자전거를 배웠습니다. 그때는 요즘처럼 아이들용 자전거가 없을 때니 저 말고도 누구나 그렇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습니다.


어른들이 타는 자전거라 너무 커서 안장에 올라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핸들을 잡고 오른발은 페달에 올리고 왼발은 땅을 구르며 시작을 했습니다. 마치 요즘 아이들이 따는 씽씽이인가 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 단계도 여전히 안장에 앉아 자전거를 탈 수 없었습니다. 그때 동작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자전거를 한쪽 발로 타고 가다가 어느 정도 구르기 시작하면 삼각 프레임 사이로 다리를 뻗어 오른쪽에 있는 페달에 발을 올리면 자전거는 비스듬하게 사선으로 된 상태에서 왼쪽 발도 왼쪽 페달에 올려 페달을 돌려가면 탔었는데 저전거로 하는 묘기 같은 건 아녔습니다.


상당히 불안해 보이는 자세지만 어느 정도 균형을 잡으면 속도도 나고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안정적인 자세까지 만드는 동안 수도 없이 넘어지고 넘어져야 가능하고 연습을 하다 논으로 넘어져 몸을 논에 담가 본 적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도저히 그런 자세로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상상도 되지 않지만 그때는 그게 저에게는 최선이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키가 10cm쯤 더 크고 나서야 자전거를 제대로 탈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안장에 앉아서 탈 수는 없었습니다. 안장 앞 삼각 프레임의 상단바 위로 엉덩이를 다을락 말락 씰룩대며 왼쪽, 오른쪽 페달을 밟을 때마다 자전거는 좌우로 기우뚱기우뚱 거리게 타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이제 자전거를 사선이 아닌 바른 자세로 탈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정말 기쁜 일이 아닐 수 없고 자전거를 제대로 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꽤 커다란 성취감과 자신감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 요즘의 아이들은 아빠가 뒤에서 잡아주며 스스로 균형을 잡을 수 있을 때까지 잡아 주면서 자전거를 배우게 되는 그때는 늘 바쁜 부모님들에게 그럴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제가 뒤에서 여러 차례 잡아 준 끝내 성공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네요.


자전거를 제대로 타게 되면서 아버지에게 저는 위협이 되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자전거를 타고 읍내에라도 나가려고 했는데 제가 자전거를 타고 나가 버려서 낭패를 보기도 하셨을 것이고 그 후로도 자전거 쟁탈전이 계속되다 보니 아버지는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동네에 방문한 고물상에게서 낡은 자전거 한대를 사셔서 고장 난 부분들을 말끔하게 고쳐서 저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시지만 기계나 각종 도구를 다루는 일을 꽤나 잘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알게 되었던 것이지만 차량 정비도 배우셨었다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가물가물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그건 경험에서 오는 것도 있지만 나름 감각이 있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어쩌면 농사일보다 그쪽 일이 더 맞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찌 되었든 아버지는 말끔하게 자전거를 수리하여 자전거를 타는데 전혀 무리가 없는 상태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었는데 사실문제라기보다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만들어주셨죠. 그 자전거가 그냥 일반 자전거가 아니라 사이클용 자전거였습니다. 사실 그런 자전거는 그때 흔하지 않아서 남들이 갖지 못하는 것을 갖게 되었다는 것에도 저는 주변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등하교 길을 자전거로 다녀야 하는 나에게 사이클은 좀 더 많이 상체를 숙여야 했기에 그다지 편안한 자전거는 아녔습니다. 사실 이 부분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불편을 감수하고 뽀대로 타고 다니면 되는 거였으니까요.


그 시절 제가 살던 동네와 학교에서는 포장이 된 도로가 없었습니다. 비포장 도로에는 돌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도로를 사이클에 달려 있는 얇은 바퀴로 달린다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지만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고 현실로 다가온 것은 그런 도로를 빠르게 달리다 돌부리에 부딪히며 넘어지면서 자전거 앞바퀴가 찌그러져 버리는 바람에 그대로 탈 수가 없었고 사실상 수리라는 것도 아버지의 손을 거쳐서는 할 수 없고 자전거포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녔습니다.


얼마 타지도 않은 자전거와 나와의 운명은 짧았습니다. 시골 자전거포에서는 팔리지도 않을 사이클과 같은 자전거를 당연히 팔지 않았고 당연히 부품도 판매를 하지 않아 수리를 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너무 비싼 가격에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상황을 아버지는 받아들이기 싫으셨을 수도 있어 포기를 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상황 종료. 그 자전거는 조금 시간이 지나 동네에 찾아온 고물상에게 이번엔 정말로 고철 가격에 넘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빨리 돌아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아버지는 저를 위한 자전거를 마련해 주시고 수리하며 내가 신나서 타고 다닐 모습을 생각하며 행복하시기도 했겠지만 아쉬움이 꽤나 크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나 제대로 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였었던 것은 아닌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아마도 아버지만큼 무뚝뚝한 나이기에 겉으로 표현을 하지 못하지 않았을까라는 것에 무게가 실립니다.


그 후로 몇 년을 저는 아버지의 자전거가 마당에 세워져 있을 때마다 기회를 노려 타고 나가고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중학교 생활을 반 정도 지나 보내고 있을쯤 아버지는 제게 이번에 중고가 아닌 새 자전거를 선물로 사 주셨습니다. 그때 자전거를 획득하기 위한 과제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 자전거는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한 번쯤 타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 3000리 자전거였습니다.


이때의 기분을 표현하자면 내가 돈을 벌어 첫 자동차를 샀을 때 보다 더 기뻐했고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날아갈 수는 없지만 정말 날아갈 것처럼 쌩쌩 마음껏 달렸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고물상에 넘겨야 했던 그 자전거를 보면서 결심을 하셨던 것일까? 먹고살기도 빠듯한 농사일을 하며 그것도 부족하여 남의 논을 임대까지 하며 일을 하면서 여유라는 것조차 없이 살아가는데 새 자전거라니 이런 일은 엄감생심,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고 그런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제대로 된 자전거 한번 태워 주는 게 소원이셨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 자전거로 학교도 다니고 심부름도 다니고 열심히 달리는 것을 보고 그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을까라는 생각을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그 자전거는 고3 때까지 나의 등하교 길에 발이 되어 주었습니다. 30분 남짓 걸어 다녀야 하는 시골길을 좀 더 빠르고 편하게 자가용 못지않은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자전거 분실이 많아 집에서 학교 근처에 도착하면 아는 분 집 마당 뒤에 세워두고 학교를 갔었습니다. 덕분에 분실 없이 오랜 기간 그 자전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가끔 그 집 어르신들이 집을 비워두고 어딘가 가신 날에는 담을 넘어야 할 때도 있었지만 모두 잊지 못할 추억이 되어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선물해 주신 자전거 덕분에...


뿐만 아니라 자전거 덕분에 멀리 살고 있어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던 친구의 집에도 자전거를 타고 가서 만나고 오고, 자전거를 타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돌던 굴레에서 벗어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던 추억들도 점점 더 끄집어내어 지네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면서 집에 남게 될 자전거는 동생이 조금 더 탔을까? 그렇더라도 몇 년 못 타고 다시 그 고물상에게 다시 고철로 팔렸을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한 소식은 들은 적은 없었고 언제가부터 그 자전거는 집에 없었습니다.


자전거에 대한 추억이 떠오르면서 컴퓨터를 켜지는 시간조차 기다릴 수 없어 손으로 글을 써 내려왔습니다. 조금만 다른 생각으로 전환이 되면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릴 수 있을 것 같고 분명히 잊어버렸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몇 자 적지 않았는데 손가락이 힘겨워하고 글자는 알아볼 수밖에 없을 만큼 휘결 겨져서 다시 알아볼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하지만 그냥 계속 적어 내려왔습니다.


덕분에 오늘 또 하나의 잊혔던 기억 하나를 찾는 데 성공했습니다.

되찾은 기억을 더듬어 그 시절 자전거에 빠져 한 발로 자전거를 달리고 있는 내 뒷모습이 정말 내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어왔습니다. 그 뒤에서 나를 무심히 바라보던 아버지의 모습도 그리고 아들에게 자전거가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도 그려집니다.


어린 나는 아버지의 그런 마음 따위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습니다. 두 번이나 아들을 위해 자전거를 선물했을 때도 나는 자전거가 생겼다는 기쁨에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조차 못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상하셨을까?


물론 내가 기뻐하는 모습만 보더라도 마음이 뿌듯해 지시기는 했겠지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만 더 했더라면 조금의 서운함마저 생기지 않았을 텐데. 사람은 누구나 아닌척해도 은근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철부지 어린 시절 난 정말 철부지였습니다. 그 쉬운 걸 모르다니...


이제야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을 보니 이제 나이기 들어가고 있나 봅니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말...


"아버지, 감사했었습니다. 사랑합니다."


몸이 편치 않은 어머니를 홀로 두고 먼저 가신 아버지를 늘 그리 좋지 않은 시선으로만 생각을 했었던 건 사실입니다.


어린 시절 농사일 조금 도와 달라는 말을 어렵게 꺼내실 때마다 불평을 하며 한 번도 진심 어리게 도와 드리지 못했던 것이 내 마음을 더 저리게 만듭니다.


가족들에게 헌신하시다 짧은 생을 마감할 만큼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시고, 그런 고통을 술로 이겨내고 그러고 나면 늘 쓰린 속을 소다 달래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가셨는데 난 그 상황을 이해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바보같이 왜 그랬을까요? 이렇게 후회라는 것을 하게 될 줄 알았다면 그랬을까요? 왜 그땐 몰랐을까요?


아버지가 선물해 주신 자전거 덕분에 학교도 잘 다녔고, 좋은 직장에 취직도 하고, 좋은 사람 만나 결혼도 하고 이쁜 아이들도 낳아서 잘 살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까지, 어쩌면 두 다리로 걸어서 도달하지 못할 거리인데 아버지의 선물로 도달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가끔 꿈속의 아버지가 너무도 생시와 같아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아쉬움 가득하던 날이 많습니다. 요즘 꿈에서도 아버지를 뵌 지가 오래된 것 같습니다. 가끔 찾아오셔도 되는데 제가 부담스러울 것 같아 그러신 거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밤 꿈속에서 왼발로 땅을 딛으며 오른발로 자전거를 타고 있겠습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등 뒤에서 조용히 바라봐 주실 거라 믿습니다. 저는 뒤 돌아보지 않겠습니다. 그냥 편안하게 바라보다 가세요. 제가 아버지를 바라보게 되면 아버지도 부담스럽고, 꿈에서 깨어난 저도 아쉬움 가득할 것 같아서요.



Image by 플라타노스 from Naver Blog.

아버지가 사 주셨던 가장 비슷한 자전거를 찾아봤습니다. 변속 기어가 없던 시절의 자전거였지만 가장 비슷한 모델을 찾아봤는데 고맙게도 플라타노스님 블로그에서 발견했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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