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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e Nov 01. 2024

그대라는 시

위트 앤 시니컬

그곳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참 고마운 존재가 있다. 자주 발걸음은 하진 못해도 가끔 우연처럼 조우하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켠이 안심되는 마법 같은 공간. 할머니 집 다락방과 같은 아늑함이 배어있는 이 비밀의 공간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인 혜화동 동양서점과 자리를 함께한다. 마치 지팡이를 휘둘러 주문을 외우면 시공간이 바뀌는 것처럼 나선모양의 계단을 오르면 나만의 작은 아지트가 나타난다.

나는 시를 동경한다. 함축적인 언어에 담겨있는 중의적 의미와 언어의 층위를 되감으며 글자 속에 천천히 머무는 여유가 참 좋다. 특히 시인이 쓴 에세이, 소설이 가진 문체에는 무언가 특별함이 있다. 어릴 땐 시집이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문장을 쉬이 읽어 내려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고 또 되짚으며 어떻게 이런 언어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을까 감탄하다 보면  다른 차원의 세상을 만나게 된다.


이 공간은 그런 시의 노래로 가득 차 있다. 무려 시인이 시 읽는 독자들을 위해 직접 만들었다. 시를 아끼는 사람들이 조심스레 다가와 조용히 책을 펼치고 소통할 수 있도록 편안히 자리를 내어준다. 하지만 시를 주제로 한 낭독회, 시와 음악이 함께하는 시& 페스타, 그리고 시 창작 세미나등으로 만남의 장도 함께 선물한다. 정말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 이런 장소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르겠다.


마침 서점지기인 시인이 잠시 출타한 사이 찬찬히 서점을 눈에 담아 보았다. 사진이 아닌 눈으로만 담으려고 했지만 올망졸망 조화롭게 자리한 친구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사진으로 몇 장 남겨두었다. 한 공간에서 시로만 이렇게 많은 권수의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책장마다 놓인 이야기의 순서와 큐레이션이 건네는 질문들이 새로운 호기심을 자아낸다. 모두에게 열린 작가의 작업공간까지도 어쩐지 다정함이 묻어난다.


오늘도 한 권의 책을 품에 안고 서점 밖을 나선다. 이 특별한 장소를 그냥 나서는 게 아쉽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다. 혜화동 로터리를 나와 서울대학교 병원 방향으로 쭉 걸어 내려오다 보면 건물 가운데 숨어있는 학림 다방을 찾을 수 있다. 우연인 듯 자연스럽게 그 공간 속으로 스며 들어서면 다시 한번 타이머신을 타고 새로운 차원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복층 꼭대기에서 (주말이 아닌 평일에 가야 사람도 없고 한적함을 만끽할 수 있다) 한잔의 비엔나커피와 오늘 선물 받은 시를 찬찬히 음미해 보시길.


진실을 말하거든 살며시 말해요
돌려서 말하는 것이 좋은 거예요
내 미약한 가슴에는 너무나 밝은
진실은 엄청난 놀라움이에요
어린아이에게 번개를
가만가만 설명해 주듯
진실은 서서히 빛나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눈멀게 될 테니까요.

- 진실을 말하거든 살며시 말해요, 에밀리 디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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