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작은영화관과 우분트

Day5 ; 울진

by 현정

바다 전망의 카페와 망양정 해돋이 광장을 옆에 둔 완벽한 민박집의 위치에 홀려서 일사천리로 예약까지 끝마쳤다. 그런데 내가 간과했던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울진에서 온전한 하루를 보낼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점, 그리고 내가 그토록 기대해 마지않았던 두 곳의 오션뷰 카페가 모두 월요일 휴무였다는 점.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이미 그 카페들 중 브런치가 유명하다는 한 곳에 가서 어떤 메뉴를 먹을지까지 모두 정해둔 상태였다. 카페의 오픈 시간까지 미리 알아두었는데, 휴일일 줄이야.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게 배낭여행의 묘미 아니겠냐고 스스로를 달래며 오늘 하루를 뭘로 채울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 오늘은 우체국에 다녀와야 했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세 권의 책을 챙겨 왔었는데, 4일 만에 세 권을 모두 완독해 버렸다. 이미 다 읽은 책을 배낭에 싸들고 다니자니 괜히 가방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다 읽은 책들은 먼저 집에 가서 쉬라고 하고, 서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민박집에서 우체국이 있는 시내까지는 택시를 타고 나가야 했다. 어차피 나가는 거 오늘은 그 동네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고 지도 어플을 켰다. 확대, 확대, 또 확대. 그러자 생소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울진 작은영화관’


‘작은영화관이 뭐지?’ 궁금했다. 검색해보니 말 그대로 작은 영화관이었다. 협동조합에서 군민들을 위해 운영하는 것 같았다. 상영관은 하나였고, 이곳에서 두 편의 영화를 교차 상영했다. 관람료는 무려 6,000원. 대형 영화관 관람료의 거의 절반이었다. 이 가격에 영화를 안 본다면 왠지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아 <82년생 김지영>을 관람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니 2시 반. 배가 고팠다. 작은 시내를 골목골목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일본 라멘집을 발견했다. 그런데 4시까지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라멘이 그다지 먹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못 먹는다고 생각하니 괜히 오기가 생겼다. 저 라멘을 기필코 먹고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옆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한 시간 반만 버티자는 생각으로.




카페 이름은 ‘우분트’였다. 핸드드립 전문점이라고 쓰여있길래 주저 없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저 그런 아이스 아메리카노 말고 정말 맛있는 커피가 먹고 싶었다. 메뉴판을 살펴보니 하우스 블렌딩 커피가 있었다. 메뉴 중에 하우스 블렌딩이 있으면 일단 시켜서 마셔보는 편인지라 오래 고민하지 않고 주문대 앞으로 다가섰다. 그런데 카운터 안쪽 작업 테이블에 앉아계신 사장님이 나를 보고도 본체 만 체였다.


“뭐 드려요?”


몸은 작업 테이블에 남겨둔 채 뭘 먹겠냐는 물음만 카운터로 보내왔다. 나는 하우스 블렌딩을 주문했고, 그때부터 사장님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사장님은 느릿느릿 일어나 계산을 마쳤다.


“사장님, 혹시 와이파이 되나요?”


내가 물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사장님이 대답했다.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나를 더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은 사장님의 시선이었다. 초점이 없는 듯한 눈동자. 사장님은 약간의 장애를 갖고 계셨다.


모든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이곳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알고 보니 이 카페는 울진지역자활센터와 한국수력원자력 한울원자력본부가 협약하여 저소득 청년의 자립을 위해 오픈한 카페였다. 나중에 뉴스를 찾아보니, 경증장애 청년이나 다문화 여성 등 저소득 자활근로자들이 약 1년 간의 바리스타 교육을 거쳐 실제 카페에 투입된다고 한다.




지나치게 자본화된 서울에 물들어서였을까. 작은영화관도, 우분트도, 굉장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민박집주인 아주머니도, 우체국 직원도, 서점 사장님도, 모두 포근했다. 동네에는 여유가 흘렀다. 나도 모르게 따뜻함에 끌려 여기까지 흘러왔구나 싶었다. 왠지 나까지 이 그림 속 한 장면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그날 나는, 마치 울진 사람이 된냥 아주 느린 저녁을 보냈다. 새로 산 책 한 권을 하룻밤 새에 다 읽어버렸을 만큼.


아, 라멘은 결국 먹지 못했다. 4시 5분이 되자마자 주린 배를 움켜쥐고 우분트를 박차고 나왔는데, 브레이크 타임이 4시 반까지였다. 라멘은 나와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배고픔 앞에 장사 없다고 근처 식당에 가서 황태 콩나물국밥을 먹었다. 나 사실 라멘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소리 없이 외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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