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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도쿄여행기 1✈️

여행의 시작

by 꿈꾸는 momo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미술 강의를 들으며 막연히 '도쿄의 미술관만 둘러봐도 좋겠다.' 생각했다. 도쿄에는 접근성이 뛰어난 박물관이 여럿 있고, 인상파 화가들의 걸작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인상파가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絵) 등에 영향을 받은 “자포니즘(Japonism)” 흐름이 있다는 점도 매우 흥미로웠다.

Tsunami_by_hokusai_19th_century.jpg

언젠가 일본의 화가 우키요에의 작품을 본 적이 있다. 그때의 강렬했던 자극이 떠오르며 마음이 부풀었다. 평생에 한번 있는 학습연구년제(교원이 일정 기간 학교일을 떠나 연수·연구·자기계발 등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보내고 있는 자의 '꿈'같은 마음이었다. 불가능했던 계절에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상상은 얼마나 달콤한가! 팀원들과 밥을 먹으며 불쑥 '꿈'같은 말을 던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J는 격렬한 박수로 동의했고 Y는 광속으로 일정을 추진했다. 항공권과 숙소를 예약하고, 일정을 공유하는 Y의 메시지에 남은 둘은 빠른 입금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항공권을 예약하고 나서도 실감이 안 났으나 하루에 2만보를 걸어도 지치지 않는 J와 Y의 보폭을 따라가기 위해서 열심히 체력을 다졌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새벽부터 움직이는 일정에 몸이 긴장했나 보다. 잠을 못 잤다. 이놈의 예민함이란. 부실한 수면에 정신이 산란한 채로 공항에 도착했다. 평일인데도 여행객이 붐볐다. 여권을 꺼내어 해외로 나가는 경험이 하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몽롱한 정신 때문에 그런지 일행이 하는 걸 눈치껏 살피며 따랐다. 이 두루뭉술한 정신상태가 위기를 맞게 되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보조배터리를 소지하고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수하물에 넣어야 한다는 두 사람의 말에 급히 캐리어를 열어 틈사이로 끼워 넣었다. 얼마 전 호주를 다녀온 적 있는 그녀들의 말이 내 경험보다 신뢰할 만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해외로 갈 때는 다른가보다.'

출국장의 긴 대기줄에서 앞사람의 보폭을 따라 느릿느릿 우리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즈음, 아무 의심 없이 J와 Y의 말을 수용한 나의 행위는 공항 안내방송으로 출력되었다. 수차례 내 이름이 울려 퍼졌다.


확, 정신이 들었다.

수하물 창고 셧터가 열리길 기다리는 당황한 어린양이 보이는가. 셧터가 열리자마자 스프링처럼 뛰어오는 내게 배가 남산만 한 임산부 직원은 난색을 표했다.

"노란선에서 기다리세요!"

내 앞에 한 명이 더 있었다. 괜히 위안이 되었다. 내 차례가 되어 가까이 갔을 때도 그녀는 수하물만 바라보며 건조하게 말했다.

"캐리어 여세요. 보조 배터리 빼세요."

허둥지둥 다이얼을 돌려 캐리어를 열고 보조 배터리를 빼낸 후에도 그녀는 여차저차 말이 없었다.

"가세요."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를 조작하며 처리하는 그녀의 손길처럼 기계적인 멘트였다.

"그럼 이건 어떻게 해요?"

그 질문이 얼마나 바보스러운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녀의 어떤 말을 기다렸던 것 같다.

"가세요."

여전히 눈을 내려 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J와 Y가 환하게 반겼다. APEC정상 회담으로 인해 막혀있던 출국장이 임시로 열렸던 거다. 난감한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렇게 도쿄여행이 시작되었다. 어떤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것도 모르는 자유여행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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