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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도쿄여행기 3✈️

by 꿈꾸는 momo

잘 잤다. 다행이었다. 일찍 잠이 깨서 살포시 숙소를 나왔다. 주변을 좀 둘러볼 심산이었다. 호텔 1층 구석에서 아무렇게나 잠이 든 소년 둘을 발견했다. 타일 바닥의 찬기도 못 이길 젊음은 꼬질꼬질한 행색에도 송곳처럼 튀어나왔다. 길고양이처럼 방황하는 이들의 십 대를 바라보며 기도했다. 애틋한 마음이었다.


도쿄의 아침공기는 찼다. 폐 속 깊이 전해지는 찬 기운에 털이 쭈뼛쭈뼛 솟는 것 같았다. 조금만 돌다가 들어가야겠다. 우리 동네와 다른 가로수, 다른 자동차, 다른 냄새를 맡으며 얼마간 걷다가 이내, 왔던 방향으로 몸을 돌이켰다. 방금 지나친 건물에서 나왔던 한 남자가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다. 그 남자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뒤돌아 건물 위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두 번을 그렇게, 걷다가 멈춰서 돌아섰다. 누군가를 향해 돌아서 미소 짓는 그 장면이 따뜻하고 사랑스러웠다. 가슴이 뭉클했다. 애인일까, 아내일까, 아이일까. 궁금했지만 나는 손을 흔드는 남자만을 계속 쳐다보았다.


여전히 세상모르고 널브러져 자고 있는 소년들을 지나 편의점에 들렀다. 물과 요거트를 좀 샀다. 코가 찡찡거렸다. 머리도 몸도 가볍지가 않아 한숨이 났다. 방문을 여니 J와 Y가 깨어나 있었다. 괜찮냐는 물음에 잘 잤다고 대답했다. 제법 괜찮은 호텔 조식으로 배를 든든히 채우자, 어제 먹었던 연어뱃살구이가 트림을 하는 듯했다. 두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그것들이 내 장에서 몽땅 다 탈출하고 나서야 난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미리 단속을 할 요량으로 감기약을 하나 사 먹었다.


신주쿠 지하철은 수많은 노선과 사람들로 어지러웠다. 구글 맵 하나를 의지해 초록색 노선을 향했다. 초록색 노선을 무사히 찾았다 싶어 신난 아이처럼 지하철을 탔다. 손잡이도 초록색이었다. 자유여행이 처음인 J가 긴장된 마음으로 재차 확인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 알아채지 못했을 거다. 두 정거장쯤 지나고 내려서야 같은 플랫폼 양쪽을 잘 살펴야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노선이 제대로임을 확인하며 안심하고는 지하철 안도 역시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현대인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스마트폰에 꽂혀있는 시선들 속에서 한 청년이 책을 읽고 있었다. 세로로 읽어 내려가는 책. 일본어와 한자로 채워진 그 종이책이, 책갈피를 꽂고 덮는 그 청년의 시선이 내 시선에 머물렀다. 그냥, 좋았다.


국립 서양미술관을 가기 위해 내린 거리도 역시 사람과 차로 붐볐다. 고등학교 때 외국어로 배웠던 히라가나와 한자들이 그림처럼 즐비한 거리가 놀이동산에 온 것처럼 들뜨게 했다. 우에노 공원 곁에 있는 미술관이라 일부러 공원을 통해 걸었다. 우람한 나무가 즐비한 공원은 이 도시의 나무들이 얼마나 많은 세월을 견디고 있는지 알게 했다. 전쟁을 많이 겪은 우리나라와는 확실히 대조가 되었다. 나는 괜한 시기심이 일어 오래된 신사와 유럽풍의 건축물들이 어우러진 이 한갓진 풍경들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같은 색 옷과 모자를 쓰고 뛰어노는 어린아이들과 그늘이 많은 나무 아래서 첼로를 켜는 노인을 만났을 때에야 평온이 찾아왔다. 그래, 여기도 어린아이와 노인이 사는 곳이지. 그저 사람 사는 곳이지.


햇살이 쏟아졌다. 아, 햇살이 피부를 뚫고 내장을 통과하는 느낌. 내 모든 장기가 소독되며 세포들이 생기 있게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햇볕을 쪼이는 기분은 살랑살랑했다. 미술관 앞의 광장에서 만난 로댕의 조각들도 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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