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봄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통해 4.3을 미리 만나서일까, 제주의 기행은 역설적으로 아름다웠다.
#1일 차
오후 네 시.
한낮의 기온은 27도까지 올랐는데 바람은 강했다. 이호테우해변에 도착한 나는 망설임 없이 신을 벗었다. 제주를 온몸으로 누리리라! 파도는 원담에 부딪혀 포말(泡沫)을 그리고 거친 바람은 나를 쓰러뜨릴 듯 몰아붙였지만, 아무 문제 되지 않았다. 해변을 맨발로 걸으며 제주도가 나에게 걸어오는 말을, 풍경을, 지는 일몰을 숙연한 마음으로 걸을 준비가 됐기 때문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제주의 풍광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시작한 여행은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다.
#2일 차
4.3의 기록을 따라 걸었다.
제주 4·3 사건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1947~1954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희생 사건이다. 해방 후 혼란과 경찰의 발포 사건으로 주민 불만이 커졌고, 1948년 단독선거 반대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정부는 강경 진압을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무장대와 무관한 주민들도 대량 희생되었으며, 사망자는 1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후 국가 조사로 공권력의 과잉 진압이 인정되었고, 희생자 명예 회복과 정부의 공식 사과가 이루어졌다.
관덕정에 모여 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은 후 주정공장, 곤을동, 연북동을 둘러보며 현대사에 이어지고 있는 반목과 갈등을 들여다보았다. 개인적이고 사소한 일이 군중의 울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던 상황을 정치적, 이념적으로 통제한 처참한 역사. 울분과 투쟁의 집단적 저항에 무력과 통제로 반응했던 권력 집단의 폭력에 대해 이제야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팠다. 여전히, 이러한 이념적인 반목이 일어나는 21세기의 대한민국의 현재와 겹쳐졌다. 우리 국민이 풀어야 할 거대한 숙제가 아닐까 싶다.
아름답고 유명한 관광지는 모두 집단 학살지라는 해설사의 말이 참 역설적이었다. 어느 아름다운 풍광 앞에서 사진을 찍을 때, 무심코 그리는 v자가 주춤해지는 이유였다.
아무개의 설움을 달래느라 바람은 저토록 바다를 쓰다듬는가, 남아있는 자들의 숨을 달래느라 꽃은 그렇게 향기로운가! 그러고 보니 제주도의 바다는 짠내가 나지 않았다. 아픔을 딛고 이어가는 제주 도민의 삶이 눈물 같은 바다 냄새를 덮어버린 것일까. <2025. 4.26의 기록>
늦은 점심을 먹고 우리 팀은 우도를 향했다. 우도의 하늘과 바닷빛을 잊지 못한다. 홍조단괴로 이루어진 해안을 맨발로 걸으며 자연이 주는 위로를 누렸다. 생애 처음 덜덜거리는 스쿠터를 운전하며 느끼는 감각에 낯설어하면서도 즐겁게 우도 한 바퀴를 달렸다. 잠깐 들른 카페에서의 땅콩 아이스크림과 문어, 한라봉 빵도 다시 생각날 것 같다. 세 시간의 우도 여행을 끝내고 동문시장으로 가는 길, 가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한 김녕해수욕장의 바닷빛과 일몰 또한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 같았다. 변화무쌍한 제주의 자연은 늘 절묘한 타이밍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은 한순간도 같은 모양이 아니다. 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이어가며 공존해야 할지, 무겁게 고민할 시대임이 분명하다.
#3일 차
이색적인 메뉴가 궁금해 들른 카페. 그곳에서 만난 참깨라테와 커피 향은 환상적이었다. 진심으로 친절했던 사장님의 설명과 배려 덕분에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제저녁 동문시장에서 사 먹고 남았던 음식들을 싸 들고 근처 공원을 향했다. 스위스에서 여행 온 일행에게 작은 간식을 선물하며 달콤한 인사를 주고받기도 했다. 어디서나 작은 배려와 관심이 서로의 마음을 달콤하게 한다. 우리의 여행이 즐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서로를 알아가는 열린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가 오는 날이었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제주의 자연은 운치 있는 모습으로 반겼다.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연예인의 집이 소품샾으로 개조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갔다. TV로만 접했던 장소를 직접 밟으며 그 사람의 마음과 일상이 묻어난 장소를 통해 그 사람과 더욱 친근해진 느낌이었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유동룡 미술관이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한 흔적이 고스란히 그의 작품 속에 투영되어 있었는데, 그의 생각들이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건축을 통해 자연과의 균형을 제시하고 싶었던 그의 생각처럼 약한 것과 강한 것의 공존, 화합, 그리고 인간의 욕심에 지배되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가치에 녹아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4일 차
제주 여행 마지막 날, 현지인만 안다는 맛집에서 제주에서만 먹을 수 있는 토속 음식으로 배부르게 아침을 시작했다. 비행시간이 달라 먼저 두 분을 배웅하고 남은 둘이 들른 곳은 조천에 있는 해녀의 부엌이었다. 해녀의 이야기를 풀어낸 공연과 함께 먹는 음식은 참으로 색다른 경험이었다. 자연물을 음식으로, 자연이 주는 맛을 창의적으로 해석하고 접시에 담아낸 요리에 눈과 입이 즐거웠다. “바다가 허락하는 만큼, 숨이 남아있는 만큼, 욕심부리지 말고.”라는 해녀의 수칙이 마음 깊이 와닿았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기 위해,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해석하고 고민하며 행동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