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 언더테일(2015)
해당 글은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토비 폭스의 언더테일(2015)에 대한 최소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예술 작품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려 보자. 대배우가 눈물을 흘리며 서글프게 연기하는 영화 속 한 장면, 섬세한 감정선이 돋보이는 소설의 한 챕터··· 그런데 만약 단순한 전자음과 투박한 8비트 그래픽으로 이루어진 게임이 누군가에겐 인생 최고의 감동을 선사했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바로 2015년 출시되어 전 세계를 뒤흔든 인디 게임, 언더테일의 이야기다.
유튜브에 올라온 많은 플레이 영상에서는 수많은 플레이어가 게임의 엔딩에서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그 이유는 쉽게 설명하기 어렵다. 어떻게 이 기술적으로 제한된 레트로틱한 사운드가, 현대 게임의 정교한 사운드트랙보다 더 깊은 감정의 파도를 일으킬 수 있었을까? 언더테일의 음악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세 가지 핵심 요소가 잘 맞물린 덕이다. 첫째는 기술적 한계에서 피어난 칩튠 음악 고유의 순수함, 둘째는 모든 인물과 장소, 감정을 기억하는 라이트모티프, 셋째는 플레이어의 도덕적 선택에 따라 아름다워지거나 타락하는 상호작용적 사운드트랙이다. 그럼 지금부터는 이 세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언더테일의 8비트 사운드가 어떻게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는지 탐구해보자.
1. 칩튠 음악
단순히 뿅뿅거리는 음악이 아니다.
언더테일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칩튠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칩튠을 단순히 옛날 게임 음악 정도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독립적인 음악 장르이자 하나의 문화 형식이다. 칩튠은 1980년대 닌텐도의 패미컴이나 게임보이 같은 구형 게임기 및 컴퓨터에 내장된 사운드 칩으로 만들거나, 그와 유사한 음색으로 제작된 음악을 총칭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오버월드 테마를 들어보자.
https://youtu.be/iy3qq7zc4EY?si=stvQV3xrfgH5_FdO
칩튠의 가장 큰 특징은 기술적 한계에서 비롯된다. 예시로 등장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총 용량이 40kb인 것을 생각하면, 현대 디지털 오디오처럼 실제 소리를 녹음하여 재생하는 방식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미리 지정된 몇 가지 기본 파형을 합성하여 소리를 만들어냈다. 전류의 ON/OFF를 반복해 만드는 딱딱하고 각진 소리인 사각파는 날카롭고 명료한 특성 때문에 칩튠 음악의 주 멜로디에 주로 사용되었고, 사각파보다 부드럽고 둥근 소리를 내는 삼각파는 주로 베이스 라인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운드 칩들은 동시에 낼 수 있는 소리의 수가 3~4개에 불과했다. 즉, 화려한 화음이나 복잡한 질감을 표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이 극한의 제약은 작곡가에게 한 가지에 집중하도록 했는데, 바로 음악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인 멜로디와 작곡 그 자체다. 화려한 효과나 풍성한 악기 구성으로 단점을 가릴 수 없기에, 멜로디는 그 자체로 기억에 남을 만큼 강력해야만 했다. 작곡가들은 제한된 채널로 화음을 표현하는 것처럼 들리게 하기 위해 화음의 구성음을 빠르게 연속적으로 연주하는 기법인 아르페지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이 기법은 칩튠 장르의 상징적인 특징이 되었다.
이러한 기술적 배경은 칩튠 음악에 독특한 감성적 힘을 부여하는데, 바로 순수성과 정직함이다. 웅장한 오케스트라 음악을 듣다보면 때로는 감정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슬프고, 벅차오르는 순간이 어디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반면, 사각파의 꾸밈없는 비프음에는 어떠한 과장이나 기만도 없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날것의 형태로 전달하며 플레이어가 스스로 그 감정을 해석하고 연결할 여지를 남겨둔다.
언더테일의 캐릭터 묘사는 괴물이라는 겉모습을 넘어 캐릭터들의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 집중되어 있다. 꾸밈없고 정직한 칩튠의 사운드는 이러한 게임의 주제와 완벽하게 결합하여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제시해준다. 이는 곧 플레이어가 캐릭터들과 직접적으로 교감하도록 이끌며 언더테일이 주는 깊은 공감의 원천이 된다.
2. 라이트모티프
언더테일에서는 언어적 수단보다 강력하게 쓰인다.
언더테일 사운드트랙의 두 번째 비밀은 라이트모티프라는 음악 기법에 있다.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 있지만 개념은 매우 간단하다. 라이트모티프는 특정한 인물, 장소, 혹은 아이디어와 연관되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짧은 음악적 악구를 의미한다. 영화 스타워즈의 The Imperial March라는 음악을 들어보자. 이 음악이 들리면 우리는 다스 베이더가 곧 등장할 것임을 즉각적으로 알게 된다.
https://youtu.be/s3SZ5sIMY6o?si=MHz5xoap8AAx9LyL
언더테일은 이 기법을 그 어떤 게임보다 정교하고 집요하게 사용하여, 사운드트랙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거미줄처럼 엮어냈다. 거의 모든 곡이 다른 곡의 일부 멜로디를 공유한 덕에, 게임 세계에 깊은 연속성과 공유된 역사의 감각을 부여할 수 있었다.
게임의 라이트모티프 중 하나를 살펴보자. 바로 Once Upon a Time이라는 테마이다. 이 멜로디는 안전, 역사, 그리고 주인공의 여정이라는 개념을 상징하며 게임 전반에 걸쳐 변주된다.
https://youtu.be/0AQMAth2gio?si=FLhB2UyMzjKdkV_5
이 테마는 게임의 오프닝에서 처음 등장하며, 인간과 괴물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자연스레 플레이어는 이 멜로디에 이야기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https://youtu.be/5BrJzFtOnwo?si=KYiYobFp0Ylu1-Z_
오프닝이 끝나면, 그 멜로디는 극도로 단순화된 칩튠 버전으로 다시 들려온다. 이 덕에 플레이어는 본격적인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 이 멜로디를 두 번이나 듣고 친숙함을 느낀다.
https://youtu.be/0UkRqMFMZic?si=Bl68IpDaPJ4yGyz2
이후 게임을 진행하며 도착한 집. 이 테마에서는 38초부터 멜로디가 부드러운 기타 연주로 흘러나온다. 이때부터 멜로디는 안전과 집이라는 감정과 구체적으로 결합된다.
https://youtu.be/1HIKNbnV8nw?si=0zms4Pfb_qQW6EsM
게임의 끝자락, 왕을 만나기 전 새로운 집에 도착했을 때 이 테마는 다시 한번 등장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멜로디가 더욱 장엄하고 애상적인 분위기로 편곡되어 있다. 이 음악은 토리엘의 집에서 느꼈던 안도감을 상기시키면서도, 여정의 끝이라는 슬픔, 몬스터들이 말해주는 지하 세계의 역사가 더해져 훨씬 복합적이고 강력한 감정적 경험을 느끼게 해준다.
이처럼 언더테일의 라이트모티프는 비언어적인 스토리텔링 장치로 기능한다. 플레이어 내면에 감정의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것이다. 몇 시간이 넘는 여정 동안 심어진 수십 개의 작은 감정적 단서들 위에 세워진 음악은 결국 플레이어를 울고 웃게한다.
3. 상호작용적 사운드트랙
언더테일의 사운드트랙은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바뀐다.
언더테일의 음악은 플레이어의 도덕적 선택을 적극적으로 듣고 반응한다. 특히 모든 것을 파괴하는 몰살 루트에서 그 특징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스팀 페이지에서 보이는 이 게임의 캐치프레이즈는 <아무도 파괴할 필요 없는 RPG>이다. 몰살 루트는 이 근본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행위다. 이때 음악은 플레이어가 사랑했던 익숙하고 즐거운 테마들을 뒤틀고 왜곡하여 끔찍한 무언가로 바꾸어버린다.
몰살 루트에서 한 지역의 모든 몬스터를 죽이고 나면, 무작위 인카운터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 대신 전투 화면에는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라는 섬뜩한 문구만 나타난다.
이때 전투와 맵을 이동할 때 흐르는 배경음악은 새로 작곡된 곡이 아니다. 플라위의 메인 테마를 1200% 느리게 재생한 것이다. 그 덕에 활기찼던 멜로디는 느리고 음산하며 불길한 배경 소음으로 변한다.
https://youtu.be/L2RT1ZiOtHQ?si=93dnFzDID53-q7o9
이 음악은 플레이어에게 엄청난 공포와 죄책감을 안겨준다. 한때 즐거움과 모험의 상징이었던 각 지역의 메인 테마는, 플레이어의 학살 행위가 남긴 공허와 죽음을 표현하는 소리가 되었다. 게임은 이 장치를 통해 플레이어가 이 세계의 음악마저 죽였다는 사실을 직접 귀로 듣게 만든다.
https://youtu.be/XGzYhJcm-Jw?si=M38SMbxLCURNaFWA
다른 사례도 있다. 언다인과의 일반적인 전투 테마를 들어보자. 영웅적이고, 빠르고, 자신감에 차 있다. 언다인의 라이트모티프에 워터폴 테마를 결합하여,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괴물의 미래를 위해 싸우고 있음을 들려준다.
https://youtu.be/xV4pZgTe94E?si=msHQlRq7SU9hbW2l
몰살 루트에서 언다인은 불사의 언다인으로 변하며 플레이어를 막아선다. 이때 언다인의 테마는 완전히 다른 곡으로 변한다. 구조적으로는 같은 모티프를 사용하지만, 광적인 피아노 연주와 훨씬 더 절박하고 비극적인 편곡으로 재구성된다.
이 루트에서 언다인은 더 이상 자신만만한 근위대장이 아니다. 세계의 마지막 희망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플레이어에게 내던지는 영웅이다. 이 때문에 음악은 단순한 전투 테마에서 비극 테마로 승화된다. 플레이어가 이 전투에서 더 큰 무게감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선택이 이 영웅적인 캐릭터를 절망적이고 비극적인 상황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결국 플레이어는 캐릭터들의 적일 뿐만 아니라, 음악 그 자체의 적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몰살 루트에서 게임이 주는 감정적 무게는, 플레이어가 스스로 초래한 결과를 귀로 들으며 마주해야 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게임은 자신의 사운드트랙으로 플레이어의 행동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비춰준다.
이렇게 언더테일은 단순한 소리가 어떻게 우리를 감동시키는지에 대한 역설을 명쾌하게 해결한다. 제한된 음색은 오히려 복잡하게 얽힌 라이트모티프의 서사적, 감정적 연결고리가 다른 방해 요소 없이 빛나도록 해준다. 8비트 사운드의 공허함은 플레이어 자신의 감정과 선택으로 채워지도록 설계된 것이다.
심오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선 사실적인 그래픽이나 100인조 오케스트라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 오늘의 게임, 언더테일이었다.